국역 국조인물고 김세렴의 비명 저자 허목(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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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世濂 ]
김세렴의 비명(碑銘)
저자
허목(許穆)
본관
선산(善山)
이명
자 : 도원(道源)
호 : 동명(東溟)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59 광해시 이화인(光海時罹禍人)
공의 이름은 세렴이고 자(字)는 도원(道源)이고 성은 김이며 본관은 일선(一善, 선산(善山))이다. 증조 김홍우(金弘遇)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이고, 할아버지 김효원(金孝元)은 선조(宣祖) 때에 벼슬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되었으나 당로(當路)한 자에게 거슬리어 배척받아 영흥 도호부사(永興都護府使)로 나가 있다가 졸서(卒逝)하였으며, 아버지 김극건(金克鍵)은 통천 군수(通川郡守)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허봉(許篈)의 딸이다. 뒤에 공이 귀해지고 나서 추은(推恩)하여 부사 부군(府使府君)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군수 부군(郡守府君)은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허씨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명나라 만력(萬曆, 신종(神宗)의 연호) 21년(1593년) 12월 1일에 공이 태어 나니, 우리 선조 26년이다. 아이 때부터 단중(端重)하여 예의가 있고 재예(才藝)가 뛰어나서 명예가 일찍부터 나타났다. 20세에 허 부인이 작고하고 나서 3년 뒤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뽑히고 이듬해에 갑과 제일인(甲科第一人)으로 뽑혀서 예조 좌랑 겸 시강원 사서(禮曹佐郞兼侍講院司書)가 되었다가 이윽고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니, 바로 광해군 9년 모후(母后)를 폐위(廢位)하자는 의논이 있을 때인데, 공이 그 주장한 자를 배척하여 탄핵하였으므로 죄를 얻어 곽산(郭山)으로 귀양 갔다. 1년 뒤에 강릉(江陵)으로 옮겼다가 또 1년 뒤에 풀려나서 편리한 대로 거주하도록 허가된 지 5년 뒤에 인조가 반정(反正)하고 나서 수찬으로 불려와 곧 헌납(獻納)으로 고쳐 제수되고,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벼슬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어사(御使)로서 호서(湖西)를 염찰(廉察)하였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떠났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겨졌으나 다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다시 교리로서 헌납으로 옮겨지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임금이 강화(江華)로 출행(出幸)하면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공에게 명하여 왕세자를 따라 전주(全州)로 가게 하였는데, 공이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군중(軍中)에 있다가 할머니 정 부인(鄭夫人)이 작고한 소식을 듣고 분상(奔喪)할 때에 체찰부(體察府)에서 타던 말을 타고 가도록 허가하였다. 뒤에 당로(當路)한 자가 분상에는 역마(驛馬)를 타지 못하는 법이라 하여 전천(銓薦)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영의정(領議政) 김유(金瑬) 공과 지경연사(知經筵事) 정경세(鄭經世) 공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억압하는 것’이라 하여 그 저해하는 자를 다 내치고 또다시 수찬으로 불러들였다. 공이 상소하여 스스로 법을 범하였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진삼1)(陳三)이 죽는 것이다.” 하고 부르기를 마지않으므로, 어쩔 수 없어 들어와 사은(謝恩)하되 오히려 힘써 사양하고 이어서 병을 핑계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갔는데 무릇 세 번이나 불러 부교리(副校理)로써 들어와 사은하고 여러 번 옮겨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다시 어사로서 호남(湖南)에 나갔는데, 민정(民情)과 정폐(政弊)를 아뢰니, 임금이 포털한 조세를 특별히 감면하여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돌아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을 때에 공신(功臣) 등이 장묘(章廟, 원종(元宗))을 추존(追尊)할 것을 앞다투어 말하고 이를 불가하다고 말하는 자들을 다 배척하여 제거하였는데, 공이 학사(學士)들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힘써 쟁론(爭論)하였다. 이윽고 집의(執義)로 개차(改差)되었는데, 사양하여 아뢰기를, “임금의 위세가 날로 엄해져서 대소 인원이 두려워하여 떨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예로부터 어찌 이처럼 언로(言路)가 막히고서도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을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삼사(三司)를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었다. 이때 조정에서 되[虜]를 우려하여 바야흐로 강화에 성을 쌓고 호서ㆍ호남ㆍ영남 각도에 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유생(儒生)들을 시험하여 재능이 없는 자는 종군(從軍)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또 청천강(淸川江을) 북쪽 땅을 포기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공이 상소하기를, “국가에서 백성의 마음을 잃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낱낱이 말하였으며, 또 “인심이 떠나서 대세가 기울었으므로 전하께서 열 길의 성과 백만의 무리를 가지셨더라도 승패(勝敗)의 수(數)에 이로울 것이 없으니, 뭇 신하가 이 계책을 만든 것이 잘못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조정의 의논에 붙였는데, 찬성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그 일을 행하지 않았다. 공신 이귀(李貴)가 자천(自薦)하여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객(客) 중에 이귀에게서 벼슬 하나를 구하는 자가 있자, 이귀가 마음속으로 경박하게 여기어 그 사람을 계몽시키려 했다는데, 스스로 자랑하고 요구하는 부끄러움을 이귀가 또한 부끄러워하였거늘, 어찌 당당한 성조(盛朝)에서 이귀가 하지 않은 것처럼 이귀를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귀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공을 배척하여 현풍 현감(玄風縣監)을 삼았다.
현풍현에 이르러 학규(學規)를 세우고 향약법(鄕約法)을 수정하였는데, 조제(條制)가 상밀(詳密)하고 한 해가 지나서는 고을이 매우 다스려졌다. 어느 재상(宰相)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어질게 여기고 그 조제를 올리게 하여 사방에 반행(頒行)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역모를 고발한 자가 있었는데, 공에게까지 연루되었으나 임금이 곧 풀어 주었다. 그해에 병 때문에 고을을 떠나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까지 하여 그 끼친 사랑을 잊지 않았다 한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대마도(對馬島)의 부관(副官) 평조흥(平調興)이 그 도주(島主)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날마다 그 국가에 참소하고 이어서 갖가지로 우리와 불화(不和)를 꾸몄으므로 관백(關白)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낼 것을 요구하여 불화를 시험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을 부사(副使)로 삼아 일본에 가게 하였다. 바닷길 5천 리를 가서 그 국도(國都)에 이르니, 관백이 크게 기뻐하여 당(堂)에 오르게 하는 예우를 하였으며, 길을 닦고 관소(館所)를 수축(修築)하는 등 공장(供帳)이 매우 숙연하였다. 한편 그 귀신(貴臣)을 시켜 관제(官制)ㆍ복색(服色)에 관한 일을 묻고 이어서 ≪시경(詩經)≫ㆍ≪서경(書經)≫과 인의(仁義)에 관한 설을 서로 말하게 하였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해외(海外) 사람이 이제야 군자의 말을 얻어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들이 주는 선물을 다 받지 않았는데, 관백이 관소의 공장한 나머지로 황금 1백 70정(錠)을 갖추어 전별금이라 말하였으므로, 받아서 금절하(金絶河)에 이르러 얕은 물에 던지고 말하기를, “내가 화뢰(貨賂)를 받지 않은 것을 보일 뿐이니, 쓸모 있는 것을 쓸모 없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뒤에 대마도에서 그 금을 거두어 세급포(歲給布) 1만5천 필을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오니, 임금이 막 남한산성에서 돌아왔었다. 공이 사간(司諫)으로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특진하여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들어와 병조 참지(兵曹參知)ㆍ병조 참의(兵曹參議)ㆍ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옮겼다.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에 다시 이조 참의(吏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다시 승지가 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청원하여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가 되었다가 1년 뒤에 그 도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곳 풍속은 오랑캐들과 섞여 살아서 쉽게 분노하고 쉽게 반역하며 수령(守令)이 무인(武人)을 거느리고 불법을 많이 행하는 것을 백성이 원망하므로, 공이 대동법(大同法)을 거듭 밝혀서 배정하고 날라 들이는 것을 외람하게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북변(北邊)은 포흠(逋欠)이 오래 쌓이고 유망(流亡)이 더욱 많으므로, 군현(郡縣)에서 회계(會計)에 넣지 않은 곡물을 거두고 또 영저곡(營儲穀) 1만 1천 6백 석을 내서 갚고, 그 나머지 역(驛)은 아뢰어서 다 면제하였으며, 향약을 증손(增損)하여 군현에 반행(頒行)하고, 부학(府學)에 선비를 모아 친히 학예(學藝)를 권하고 열읍(列邑)에서 학문에 우수한 자를 뽑아서 군현의 선비를 가르치고, 군졸을 훈련하고 병기를 수리하여 급할 때에 대비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옮겼는데, 평안도는 일이 많아서 백성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조정에 청하여 3천 냥의 돈과 5천 석의 곡물을 얻어서 백성의 힘을 덜어 주었다. 청나라 사신이 잇달아 이르러 그들이 우리에게 오만하고 포학하여 무례한 것이 많았으나 공이 접대하는 데에 잘못이 없고, 또한 뇌물로 그 마음을 교만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저들도 꺼려서 탐욕을 자행하지 못하였다. 평양에 양몽재(養蒙齋)를 두어 대란(大亂)이 진정되자 더욱 선비를 기르는 일을 먼저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大司憲兼弘文館提學)이 되었다가 곧 도승지(都承旨)로 개차되었는데, 임금이 매우 신임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발탁 임명하므로, 이에 군현의 방납(防納)을 매우 금하였다. 공은 평소에 병이 많은데다가 양계(兩界, 함경도와 평안도)를 엽찰(廉察)하느라 4년 동안 힘들어 야위고 지난해에 맏아들 김익상(金翊相)이 죽으매 병이 심해져서 졸서하니,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 정월 17일이고 나이는 54세이다. 그해 4월에 양주(楊州) 남쪽에 있는 친족 묘역에 장사하였다가 20년 뒤에 양주 북쪽 고모현(姑母峴) 서남쪽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신중하기를 좋아하여 동지(動止)에 법도가 있고 일에 임하여 상세하고 삼가며 빠른 말이나 황급한 낯빛이 없으며 체요(體要)에 밝고 일이 간약하였으므로, 백성이 쉽게 따르므로 조야(朝野)에서 존중하였다. 경연(經筵)에 있을 때는 총명(聰明)을 계발(啓發)하고 의리를 설명하되 자세하고 적당하므로, 정승 김유가 칭찬하여 진학사(眞學士)라 일컬었고 정경세 공도 말하기를, “인물을 논하자면 당대 제일이다.” 하였다. 만년에 더욱 경학(經學)에 힘을 다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행동을 근신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바로잡기에 이르렀으며, 또 심술(心術)의 요체에 근본하여 행사(行事)를 살펴서 예서(禮書)에 이른바 밤낮으로 경계하여 덕을 지키고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을 보기를 즐거워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더욱이 시(詩)에 능하였다. 일찍이 동쪽 바닷가에 귀양 갔었으므로 동명(東溟)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동명집(東溟集)≫ 6권이 있다. 전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작고하였는데 자식이 없고, 후부인 유씨도 본관이 문화이고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유성민(柳成民)의 딸인데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아들은 김익상(金翊相)ㆍ김필상(金弼相)ㆍ김준상(金儁相)이고, 사위 두 사람은 이가우(李嘉雨)ㆍ신향(申晑)인데, 다 명가(名家)의 아들이다. 명(銘)은 이러하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덕을 삼가서 개제(愷悌)함을 돈독히 하였으니 그 행실을 보겠고, 바른 도리를 어기지 않고 통하건 막히건 바꾸지 않았으니 그 정심(定心)을 보겠으며, 착한 자를 두루 아뢰되 범하여도 숨기지 않았으니 그 공경함을 보겠고, 예도를 지키고 의리에 따라 행하여 먼 곳 사람을 복종시켰으니 그 봉사(奉使)함을 보겠으며, 힘을 덜어주고 무리를 가르쳐서 백성이 자혜(慈惠)를 기뻐하였으니 그 다스림을 보겠도다.
각주
1) 진삼(陳三) :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의 진조로(陳朝老)를 지칭한 것으로, 일찍이 적절하게 일은 논하였고 간쟁(諫諍)을 힘써 하였다. 휘종(徽宗) 때에 상소하여 채경(蔡京)ㆍ동관(董貫)등을 논죄(論罪)하다가 도주(道州)에 유배되었는데, 고종이 즉위하자 방면되어 석문(石門)에 돌아가서 농사짓고 있을 때 임금이 세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려 불렀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진 삼조(陳三詔)라 칭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김세렴 [金世濂]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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