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서원터
김명진선정비 1890
대대적 구휼사업 벌인 김명진
(재임기간 1888년 8월∼90년 6월)
김명진(1840년∼?)은 주로 외직에 많이 있었는데, 1888년(고종 7)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큰 흉년을 당해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자 조정에 구호를 요청하고, 조정에서 내려온 많은 돈과 구호양곡을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구휼사업에 힘썼다. 그래도 굶는 자가 늘자 영문(營門)의 공금 1만냥을 백성에게 나눠주는 한편 이농자에게 농토를 주어 정착하게 했다.
특히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세금징수제도)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영남일보 이하석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1129.010110751050001
풍영대를 찾지 못했다.
주변에는 원룸들이 들어오고, 치마거랑 건너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지만 쌍계마을이 정겹다.
이 마을에서는 <<쌍계마을지>>를 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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