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
보물 제350호(1963년 1월 21일). 2007년 10월에는 서원 전역이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 원년) 현풍현 동쪽 비슬산 기슭에 건립한 쌍계서원이 시초이다. 1753년(선조 6)에 사액을 받았으며, 이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04년 현의 서쪽 15리 오설면 도동의 김굉필(1454~ 1504) 무덤 아래로 옮겨 중건하였다. 이때 서원명은 보로(甫老)로 개명하였다가 이후 경상감사의 계청으로 도동으로 사액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봉안되었다.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1543~1620)는 중건 초기 서원터를 고르는데 노심하였고, 백록동규를 모범으로 도동원규를 제정하여 삭망(朔望)에 제생에게 의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1604년(선조 37)에는 역사를 관장할 원장으로 곽근을 천거하였고, 1607년(선조 40)에는 안동대도호부사로 있으면서 대구도호부사 정경세, 합천군수 여대로와 함께 통문을 내는 등 도동서원 중건을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이때 건립된 건물 중 강당의 “道東書院” 현판은 1607년에 걸엇는데, 외미액(外楣額)은 도사 배대유의 글씨이고, 정간(正間)은 퇴계의 글씨를 집자하였으며, 중정당은 봉조하 이관징의 글씨이다. 신도비는 1625년(인조 3) 김대진이 경상감사 이민구의 협력을 받아 세웠으며, 글은 장현광이 짓고, 사헌부 감찰 배홍우가 썼으며, 1626년 세웠다. 배홍우(1580~1627)는 배대유(1563~1632)의 아들로 영산현에 거주하였다. 이 가문은 1631년(인조 9년) 광해군 복립 모의 사건에 배홍우의 처남들인 유지수와 유지환이 참여하여 처형되면서, 이후로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으며, 퇴계학파로 경도되지도 않았다. 김굉필신도비에 篆을 쓴 여효증(1604~1679)은 이때 성주에 거주하였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16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부사를 역임하였다.
도동서원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중정당은 서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강학을 하는 강당(講堂) 건물이며 강당의 후면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도동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다시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경사진 대지 위에 북동향하여 있다.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인 수월루(水月樓)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맞담 사이로 난 사주문(四柱門)인 환주문(喚主門)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講學空間)이 나타나는데, 마당의 건너편에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이 있고 마당의 좌우에는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를 두었다.
강당인 중정당의 기단은 다른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면의 기단은 크고 작은 방형의 다듬은 돌들을 줄 맞추지 않고 흐트러지게 쌓은 후, 운두가 낮은 장대석을 다듬어 갑석을 얹었다. 기단의 정면에는 좌우에 2개의 석계를 두어 강당에 오르게 하였으며, 기단의 안측 끝 부분에는 갑석 밑에 용두(龍頭)를 1개씩 빼내었다.
평면은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의 좌우에는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온돌방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좌우 온돌방의 전면에는 머름 위에 문얼굴을 조그맣게 내어 분합의 띠살무늬 덧창을 달고 안쪽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뒷벽 3칸에는 바라지창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5량가의 구조이며 대청의 천장은 연등이다. 공포는 외일출목이 있는 주심포계 건물로 외출목의 행공첨차를 받치는 소로는 연꽃봉우리 모양이며, 창방의 중심에는 화반을 하나씩 받쳤다.
사당은 강당 뒤의 경사진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김굉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돌층계를 오르면 사당의 출입문인 3칸 규모의 삼문이 나타나고, 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에 퇴칸이 없는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내부는 통칸으로 처리되었다. 전면에는 각 칸마다 2짝 당판문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판석을 나란히 세운 후 운두가 얇은 갑석을 얹었으며, 기단의 정면에는 석계를 2곳에 두어 사당으로 오르게 하였다.
기둥은 민흘림의 원기둥이 사용되었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첨차와 소로로 공포를 짜 주심도리 밑의 장혀를 받치게 하였으며, 외일출목에서는 초각된 헛첨차로 행공첨차를 받치고 이들이 외목도리를 받는 익공식에 가까운 주심포식 건축이다.
일곽을 이룬 맞담은 산석으로 쌓은 후 그 위에 흙과 기와를 사용하여 담장을 이었는데,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운 담장이다.
조선 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 사당의 공포 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도동서원 사약봉행 학술연구 및 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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