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삼일 운동 관련 해결할 문제
대구 삼일 운동 관련 해결할 문제
일반적으로 1919년 3월 8일 일어난 대구의 만세 시위 때 시위대는 서문시장에 집결하여 대구경찰서에서 종로를 거쳐 동성로 달성군청 앞에서 진압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1919년 3월에 달성군청 청사는 동성로에 있었다 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달성군청 청사의 이전 시기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당시 달성군청은 신남 네거리 인근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대구의 삼일 운동 기억을 제대로 알고 이야기해야겠다.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어디에 방점을 찍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남겨진 과제이다. 대구의 삼일 운동 이야기를 살피다가 서로 어긋나는 여러 이야기를 만났다.
대구의 삼일 운동을 이야기하려면 고등경찰요사를 살펴야 한다. 이 책은 국역되어 있다. 대구시사(1973)는 고등경찰요사를 중심으로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권영배가 1997년, 이윤갑이 2006년 논문을 썼다. 권영배는 여러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전개 과정과 주도층을 살폈다. 이윤갑은 권영배의 성과를 전혀 살피지 않고 다만 고등경찰요사와 재판 기록을 중심으로 복원하려 하였다. 아쉬운 대목이다. 계성100년사와 신명100년사, 그리고 경북고와 대구농고 등의 교사를 살필 필요도 있다. 기타 지금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것으로는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1,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달성군지, 대구시사(1995),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 들이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고등경찰요사와 재판기록, 그리고 매일신보 기사이지 않나 싶다.
1. 기독교계가 주도하였음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계성의 교사와 학생들은 재판에서 거의 형을 받아 복역하였으며 학교가 1년이나 휴교하였다. 대구고보는 200명이나 참가하였지만 복역한 인물은 많지 않으며 휴교 기간도 한 달이 되지 않는다. 이만집 목사 자치 교회 운동도 이목사의 생애와 사상과 관련지어 얘기거리가 풍부하다. 그리고 도대체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한국독립만세. 무어라 외쳤을까? 재판 기록에 한국의 독립을 만세하였다 하니 대한독립만세가 맞을 듯도 하지만 아무튼.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에는 참여 인원 23,000명이라 한다. 이것은 2개월동안 경북 전체에서 일어난 시위 참가자 수이다.
김태련 남산정교회 조사인데 전도사라고 제대로 옮긴 게 있는가 하면 제일교회 조사라고 쓴 글도 있다. 그는 경북노회에서 이만집 목사를 제명할 때 장로로서 사회를 보았다. 참 묘한 인연이다. 재판 기록의 성경학당은 동산성경학교, 대구성경학원 등의 명칭으로 쓰면서 학생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성서강습생(재판)으로 장로교계의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다. 대구농림 참가 유무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2.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 형제도 이야기거리가 풍부해질 수 있다. 이 무렵 이상정은 계성 미술교사로 참가하지 않았다. 이상백 관련 재판 내용들도 다수 나온다. 이상화 이야기는 좀 더 살필 필요가 있다.
3. 2차 궐기 약속 장소가 달성공원이냐, 덕산정이냐? 2차 시위는 지금의 남문 시장이 아니라 남문밖으로 옮겨온 동문시장이며 덕산동에 있어 덕산정시장이라고도 한다. 염매시장의 어원도 찾아진다.
『대구시사 2』(1973, 최광렬) 275쪽을 참고하면, 동성정 구시장은 조선 후기 남문밖에 있던 新市로, 동문밖(현 대구백화점)으로 이전하여 동문시장으로 불렸으며, 면적은 서문시장의 약 반인 2,499평에 불과하였다. 1917년 8월 일부를 덕산동으로 옮겼고, 1919년 7월 나머지도 모두 옮겨 3,476평이 되었는데 방향과 관계없이 동문 시장으로 불렸다.
아무튼 1919년 7월 시장의 나머지도 옮기게 된 것은 달성군청사의 이전으로 때문이었다.
4. 명치정목은 지금의 계산동에 해당하며 덕산동과 붙어 있다. 위의 기록을 볼 때 염매시장은 1918년 8월 18일부터 9월 15일까지 쌀을 싸게 팔던 명치정목의 ‘염매’ 공동판매점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곳 덕산동은 동성로의 동문밖 시장, 동문 시장이 1917년과 1919년 두 차례 걸쳐 옮겨와 시장을 형성하여 동문 시장이라 불렸다. 남문밖인데 동문 시장이라 부르다 보니 오해도 생기고 하여 덕산정 시장, 덕산 시장으로 구분한 듯하다. 동성로에 동문 시장이 있었던 시기는 1911년부터 늦어도 1919년 7월 10일까지이다. 1919년 7월쯤에는 이곳에 달성군청 청사를 옮겨 지을 설비 중이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대구의 3ㆍ1 운동을 계기로 이곳은 폐쇄되어 구시장이 되었던 거다.(每日申報 1918. 8. 23) 재판기록에는 덕산정시장으로 나온다.
신문 검색 결과
김희곤, 권영배, 박진관 모두 달성군청
박순종 언급 없음
권영배, 이윤갑 논문 참고할 것.
분석 대상
권영배, 이윤갑 논문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1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대구시사 1973 385-391 고등경찰요사 위주
달성군지 370쪽 1년간 23000명! 한국사대계 8, 88쪽.
대구시사 1995?
계성, 신명, 경북, 대구농고
지역 신문
재판 기록을 통해 복원
계성이 주도, 대구고보는 일부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 문제
2차 궐기 약속 장소가 달성공원이냐, 덕산정이냐?
2차 시위는 남문 시장인가 동문시장, 덕산정시장, 염매시장
이만집 목사 자치 운동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한국독립만세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 참여 인원 23,000명
김태련 남산정교회 조사, 남산교회 조사, 남산정교회 전도사, 제일교회 조사
조사의 의미
성경학당성서강습생(재판), 동산성경학교(권영배 154쪽) 대구성경학원
대구농림 참가 유무
일제 강점기 달성군 청사의 이전 시기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대구의 3ㆍ1 운동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우선 당시 동성정에는 달성군청이 존재하지 않았다.
1. 달성군청
이만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이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 독립기'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일경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만세 행렬이 달성 군청 앞에 이르자
1-1. 약속 장소 달성공원이냐, 덕산정이냐?
2. 동문시장, 덕산정시장, 염매시장
[염매시장의 유래 19180818부터 동문 시장이 옮겨오면서 동문이 덕산시장으로 동문 덕산 염매가 섞여 불렸고 동문은 위치로 인해 탈락]
4-3. 명치정목은 지금의 계산동에 해당하며 덕산동과 붙어 있다. 위의 기록을 볼 때 염매시장은 1918년 8월 18일부터 9월 15일까지 쌀을 싸게 팔던 명치정목의 ‘염매’ 공동판매점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곳 덕산동은 동성로의 동문밖 시장, 동문 시장이 1917년과 1919년 두 차례 걸쳐 옮겨와 시장을 형성하여 동문 시장이라 불렸다. 남문밖인데 동문 시장이라 부르다 보니 오해도 생기고 하여 덕산정 시장, 덕산 시장으로 구분한 듯하다. 동성로에 동문 시장이 있었던 시기는 1911년부터 늦어도 1919년 7월 10일까지이다. 1919년 7월쯤에는 이곳에 달성군청 청사를 옮겨 지을 설비 중이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대구의 3ㆍ1 운동을 계기로 이곳은 폐쇄되어 구시장이 되었던 거다.(每日申報 19180823) 재판기록에는 덕산정시장으로 나온다.
4-5.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대구교육청, 41쪽에는 “시위대는 동문시장에서 10일 재봉기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하는데 이때의 동문시장은? 동성저인가 덕산정인가? 덕산정일 가능성이 크다.
3. 이만집 목사 자치 운동
4. 조선독립만세(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38쪽, 39쪽), 대한독립만세(이윤갑), 한국독립만세(권영배 재판기록)
한국독립만세(권영배 재판기록)
대한독립만세(이윤갑)
5.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 참여 인원 23,000명
6. 김태련 남산정교회 조사(재판), 남산교회 조사(권영배), 남산정교회 전도사
제일교회 조사(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38쪽)
김태련은 나중에 장로 이만집을 축출하는데 사회 봄
7. 예수교 성경학당에 온 성서강습생(재판), 동산성경학교(권영배 154쪽)
조사 이태학을 통해 대구성경학원의 성경 강습회에 참가하고 있던 교계 지도자(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대구정신 39쪽)
대구농림 참가 유무?
[3 1운동과 대구 지도자 이만집목사 박넝쿨 20051128]
[대구MBC 3 1절 특집 다큐 방송 자치운동의 횃불 이만집 방송 연합뉴스20060227]
[대구 3 1운동 이끈 이만집 목사 복권 한겨레20050607]
봉산동교회 > 합동 봉산교회> 지금의 드림 교회 이광세 목사는?
[봉산교회의 역사에 대해 추경호 장로님이 쓰신 글 봉산교회OB]
기독교 감리회 이만집 - 이성해 - 이호문 - 이선목 인천숭의교회 담임
[이만집 손자 숭의교회 이호문 감독 원로 추대 및 이선목 담임목사 취임 크리스천뉴스2008052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