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으로 시집 간 현풍 출신의 열부 김씨(1904년)
1904년 애고 애고 김부인아
심서방님 이별한 후 한 달이 되었어라.
불칙한 이 신명은 어이 이리 지리한고.
군자님 가신 후 두 달이 되었어라.
불칙한 내의 잔명 어이 이리 지리한고.
심서방님 영결한 후 석 달이 되었어라.
모질고 독한 내의 잔명 어이 이리 지리한고.
귀신도 무지하다.
슬프고 슬프라 가득 서리고 서리고 맺힌 포한을
어디 가 풀어 볼고 태산도 부족하고 하해도 옅을지라.
어찌 다 형언할고. 애고 애고 김부인아
내 사주가 이러 할 줄을 어느 누가 알았으리.
(중략)
가지가지 원통하네. 슬프다.
전생에 무슨 죄가 이다지 겹겹이 쌓였는가.
십 칠세에 결혼하여 육년이 지나도록
하루 한시를 시원하고 즐거운 세월도 못보고
아지랑이 안개 잦아들 듯이 썩고 타고 녹는 내 심정은
황하 물결같이 흘려보내고 밝은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여
거의 믿었는데 애고 애고 답답해라. 애고 애고 원통해라
시간이 갈수록 분통하고 원통하여 어찌 살까.
가지가지 한스럽구나.
넓고 넓은 천지에 눈을 뜨고
어찌 보며 귀를 두고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신혼의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한 ‘애고 애고 김부인’은 답답하고 원통함을 글로 남겼다. 김부인의 슬픔은 남편만을 위한 애도가 아닌, 남겨진 자신에 대한 연민과 고통이다. 지아비와 자식 없이 살아야 하는 스물 남짓의 부인은 열사(烈死)와 불효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 고향 마을 근처에는 현풍 곽씨 12정려각이 있었고, 서흥 김씨는 이 고을의 오래된 양반 가문이었다.
청상과부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았다. ‘추문’이란 자신뿐 아니라 남겨진 아이들에게까지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열녀전에 실린 이들은 남편이 죽은 뒤 수절을 하는 과정에서 거식, 대인기피, 헐벗고 굶주리기, 몸 씻지 않기, 머리 풀어헤치고 감지 않기, 머리를 잘라 얼굴을 가리기, 옷 안 빨아 입기, 신체 절단 등의 신체훼손 및 유기에 관한 각종 증상들을 보인다. 결국은 죽음이다.
송호언의 「열부 김씨전」을 간추려 보자. 김굉필 후손인 열부 김씨는 17살에 13살인 남편 심재덕과 혼인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혼인한 지 몇 달 안 돼 남편이 이상한 병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으로 가서 5년간 부지런히 약 수발을 들면서 삼가고 조심하여 한 번도 남편의 처소에는 가지 않았다.
1903년 11월 남편은 끝내 죽고 말았다. 열부는 그제야 남편 곁에 가서 시신을 받들더니 소리를 한 번 질렀을 뿐 기절해서 더 잇지 못했다. 한참 뒤에 깨어나서는 다시는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죽기 전날 밤 열부는 침실에서 촛불을 환하게 밝히고 열녀전을 한 번 읽고는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새벽 열부는 빈소에서 돌아와 누워 있었는데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의원은 원통한 피가 기해(배꼽 아래 신체의 정기가 모인 곳)에 막혀 맺힌 것이 풀어지지 않은 것이니 구할 방도가 없다 하였다. 그 날을 헤아려 보니 남편이 죽은 지 석 달 열흘 째 되는 날로 남편이 죽을 때와 같은 시간이었다. 열부가 죽은 원인을 검사해 보았으나 가슴에 동전만한 검은 자국이 있었다. 자리에는 종이 두 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남은 한을 쓴 것이고, 하나는 부모에게 이별을 고하는 글이었다.
침실 벽에는 매달 한 번씩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방님 가신 지 이제 한 달, 무딘 목숨 아직도 살아있네.” 또 화장대에는 은가락지 등의 물건들과 남편이 찼던 것을 함께 열 겹으로 싸서 넣어 두었다.
군자가 이 일을 듣고, ‘곧고도 오눈하기는 참으로 어렵다(정이온순 이결난의貞而溫順 而決難矣)’라 하였는데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하루도 어려운데 석 달 사흘을 기다린 것은 삼 년을 석 달로 바꾸어 탈상하려고 생각한 것이었는가? 그 시간을 같게 한 것은 함께 돌아가고자 함이었는가? 여러 패물을 묶어 둔 것은 뒷사람들에게 남기려는 것이었는가? 열을 지켜 죽으면서도 효에 어긋남을 자책하였으니 효성스러운 것이요, 오직 예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절제하였으니 순종한 것이다.”
고을 인사들이 그녀의 열행을 자사(경남지사)에게 아뢰고, 자사는 조정에 아뢰니 임금께서 아름답게 여겨 강주태수(합천군수)에게 정려를 내리고 그 집의 세금을 면해 주게 하였다.
야사씨는 말한다.
“내가 일찍이 강주(합천)의 소학당(향교)을 지나다가 사람이 죽어 가르침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쇠퇴하여, 끝내 삼강이 없어지고 구법이 사라져 짐승들의 자취가 이곳에 드나들게 된 것을 탄식하였다. 이에 방황하고 머뭇거리면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며 한탄하다가 남쪽으로 큰 길로 나가니 새로 그린 회칠한 벽이 환하고 아름다왔다. 물어보니 바로 열녀 김씨의 정려문이었다.
내가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아아, 부인은 실로 소학선생(김굉필)의 후예로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옛날에 구양공이 오대사를 편찬하면서 이씨의 열행을 전의 끝에 실은 것에 어찌 듯이 없겠는가? 이에 갖추어 써서 훗날 자양(주자)의 남은 붓을 이어 쓸 사람이 이런 일을 널리 모으기를 기다리노라.”
송호언, 「열부 김씨전」(이혜순ㆍ김경미 편, 2002, <<열녀전>>, 월인, 342∼347쪽.)
최김지은, 2005, 열녀, 세상을 원망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20050815.
강재철, 「종용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