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현풍군수 홍필주에게 줌(贈別洪玄風弼周)
대전현충원묘적부 공훈록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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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애국지사
성명 홍필주(洪弼周)
묘소위치 애국지사 제4묘역-441
출생/사망 시기 1857. 9. 7 / 1917. 12. 12
출생/사망 지역 충남 아산 / 충남 아산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나 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 기(李沂) 등 3명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함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등박문 등 일본의 침략원흉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 고 일황과 이등박문 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함
◯1906년 장지연(張志淵)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의 평의원이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함
◯1909년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으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함
◯1910년 일본 동경에서 이홍장이 특파한 양계초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함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현재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기호흥학원(畿湖興學 院)의 초대 학무부장(學務部長)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 전개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대전현충원묘적부」「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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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공훈록
홍필주(洪弼周)
1857. 9. 7~1917.12.12
충남 아산
대한자강회,대한협회
애국장(90)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고 일본이 황무지개척권(荒蕪地開拓權)을 요구하자 나 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 기(李沂) 등 3명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하고, 1905년 6월 나 철·오기호·이 기 등과 같이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이등박문(伊藤博文) 등 일본의 침략원흉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일황과 이등박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1906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실시되자 장지연(張志淵)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이 되어 동회의 회보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국민정신을 계몽하며 선도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나 철·이 기 등과 같이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 5적을 주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09년 3월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장지연·권동진(權東鎭)과 같이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으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6월 일본 동경(東京)에 재차 건너가 대외중신(大 重信)·두산만(頭山滿) 등 일본인을 만나 한국침략을 통렬히 논박하였으며, 그곳에서 이홍장(李鴻章)이 특파한 양계초(梁啓超)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하면서 항일투쟁정신을 나타내었다.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현재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기호흥학원(畿湖興學院)의 초대 학무부장(學務部長)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대한협회보(제1호∼제12호)
·대한자강회월보(제1호∼제13호)
·대한자강회보 제2호(1906. 8. 25 발행) 151면
·자은(紫隱)선생유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아산군지(하) 541·54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면(화보 : 동경에서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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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해학유서(海鶴遺書)(이기)에 홍필주와 관련된 세 글이 있어 옮겨본다. 이기(李沂,1848∼1909)는 조선 말기의 사상가·애국계몽운동가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이며, 전라북도 김제(金堤, 萬頃) 출신이다. 1904년 고종에게 4차에 걸친 상소를 통해 일제의 이른바 황무지개척권 강요의 부당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또한 홍필주(洪弼周)·이범창(李範昌) 등 수백인의 연합상소문으로써 일제에 동조한 이하영(李夏榮)·현영운(玄映運) 등의 매국무리를 처벌하도록 주장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에서 강화회의에 동지 나인영(羅寅永, 喆)·오기호(吳基鎬, 赫)·윤주찬(尹柱瓚) 등과 함께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직접 미국에 건너가 그 회의에 참관하려고 했지만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차선책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9월 나인영·오기호 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글 ‘자진찬(自眞贊)’을 보면 이때 홍필주도 동행하였다. 을사5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나인영·오기호·윤주찬·김인식(金寅植) 등과 함께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먼저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을사오적을 주살(誅殺)할 것을 모의하였다. 1907년 2월 거사에 착수해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 등에 대한 살해 계획도 실패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사 사실을 스스로 밝히면서 매국노를 제거하려 한 그들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풀려났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 항일구국운동을 벌였다.
http://encykorea.aks.ac.kr/ 참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海鶴遺書> 『해학유서(海鶴遺書) 12권(卷)』: 문록(文錄) 십(十) 시(詩)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setId=413796&position=4
떠나간 홍필주에게 줌(贈別洪玄風弼周)
永嘉府裏舊同年, 行住東西益悵然,
영가부리구동년, 행주동서익창연,
영가부(永嘉府, 안동군)에 있는 옛 친구가
동서(東西)를 헤매고 있어 더욱 슬프다.
滄海正當三變日, 玄都安得再來緣,
창해정당삼변일, 현도안득재래연,
바다가 세번 육지로 변하는 때를 만났으니,
어찌 현도관(玄都舘)에 다시 오는 인연이 있겠는가?
離情已判猿膓斷, 信字須憑鴈足傳,
이정이판원장단, 신자수빙안족전,
떠나는 정(情)은 잔나비 소리에 애가 끓지만
서신(書信)은 기러기 발에 묶어 전하리라.
可恨洛江流不盡, 明朝還肯放歸船。
가한낙강류부진, 명조환긍방귀선。
가장 한스러운 것은 낙동강(洛東江)이 다 흘러 버리지 않아,
내일 아침 다시 배를 타고 떠나리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setId=413796&position=5
대구군수 홍필주의 시운을 차운(次韻)함(次洪大邱弼周)
自休官後認君賢, [不走風塵只臥眠],
자휴관후인군현, [부주풍진지와면],
관직을 사직하고 그대 훌륭함을 알았으니
그는 풍진(風塵) 속에 분주히 다니지 않고 누어서 잠만 자고 있다.
爲吏亦曾緣有酒, 未歸還時坐無田,
위리역증연유주, 미귀환시좌무전,
관리가 되는 것도 술의 인연이 있고,
돌아오지 않을 때는 전답(田畓)도 없다.
靑燈起對花前月, 白首追論嶺外年,
청등기대화전월, 백수추론영외년,
청등(靑燈) 서등(書燈)과 같음. 편자주 앞에 일어나 꽃 앞에 달을 대하고,
백수(百首)의 나이에 영외(嶺外)의 해를 논한다.
獨抱妄言何處說, 人間春夢正悠然。
독포망언하처설, 인간춘몽정유연。
혼자 안고 있는 망언(妄言)을 어느 곳에 말할까?
인간의 춘몽(春夢)은 멀기만 하다.
海鶴遺書 > 『해학유서(海鶴遺書) 9권(卷)』: 문록(文錄) 칠(七) 전(傳)·잡저(雜著) > 자진찬(自眞贊)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setId=413796&position=3
자진찬(自眞贊)
乙巳九月與洪弼周·羅寅永 吳基鎬東渡日本
을사구월여홍필주·나인영 오기호동도일본
(을사(乙巳, 1905) 9월에 나는 홍필주 (洪弼周)·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일본에 갔음.)
其眼細, 其眉疎也, 是前日李沂,
기안세, 기미소야, 시전일이기,
눈은 가늘고 눈썹이 듬성한 것은 전일(前日)의 이기(李沂)이며
其髮薙, 其服洋, 前日李沂也非,
기발치, 기복양, 전일이기야비,
머리를 깎고 양복(洋服)을 입은 것은 전일(前日)의 이기(李沂)가 아니다.
是與非姑勿論,
시여비고물론,
그러나 시비(是非)는 논할 것이 없고
但看現今天下六十翁萬里行,
단간현금천하육십옹만리행,
지금 천하(天下)에 60세(歲)가 된 노인(老人)의 몸으로 만리(萬里) 길을 떠나니
此豈吾所樂者。
차기오소요자。
이것이 어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겠는가?
홍필주
http://encykorea.aks.ac.kr/
[간략정보]
•한자 洪弼周
•분야 역사/근대사
•유형 인물
•시대 근대/개항기
•성격 문신|계몽운동가
•성별 남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대표관직(경력) 대한협회 발기인
•집필자 박맹수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애국계몽운동가.
[내용]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에게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 이후 깊어지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속음청사(續陰晴史)』하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요구에 대하여」(윤병석, 『역사학보』22,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