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세계사 관점서 본 조선지역 엘리트, 사족

시골(是滑) 2015. 4. 30. 23:02
조선의 士族, 이상적 공동체 꿈꿨다
문화일보 24면 TOP
‘세계사 관점서 본 조선지역 엘리트…’ 학술대회

세계인의 눈에 비친 조선시대 지식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은 조선시대 지식인 사족(士族)을 다양한 세계인의 시선으로 재검토하는 국제 학술대회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지역 엘리트, 사족’을 24, 25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문화회관에서 마련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족’은 관직에 진출해서는 국가를 경영하는 관료로, 지역에 있을 때는 지역사회를 지배 운영하는 주체로 활동한,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지역 엘리트를 이른다.

이들은 이전의 중앙 귀족들과는 달리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생활 영역인 지방에서 향약과 서원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6세기 이후에는 조선을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건설하려 애썼다.

사족은 남성뿐 아니라 이 같은 자격 조건을 갖춘 여성들도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개념이다.

특히 이들 사족들은 우리 시대의 탈중심적인 다양한 지역 지식 공동체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현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영국, 일본, 중국, 베트남 등 12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자국의 귀족 그리고 자국의 지식인 엘리트와 사족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실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려 한다.

우선 일본의 저명한 한국사학자인 성균관대의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 교수는 기조 발표에서 중국·일본의 봉건제와 조선의 군현제를 비교 검토하면서 중국의 사대부, 일본의 무사와 조선의 사족을 비교한다. 미야지마 교수는 “중국의 경우 군현제의 틀 속에서 봉건적 요소를 도입하려 했고, 일본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부각되는 데 반해, 조선은 군현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 봉건제를 주장하는 입장 자체가 나올 수 없었다”고 밝힌다.

영국 런던대(동양아프리카 연구학부)의 앤더스 칼슨 교수도 영국의 귀족 시스템은 봉건적인 영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조선의 사족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중국의 사대부는 관료 예비군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조선의 사족은 관료뿐 아니라 지역 사회를 운영하는 주체였고, 일본 무사와 유럽의 귀족은 봉건제를 중심으로 영지를 거느린 귀족이었던 데 비해 조선의 사족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와 협조도 하지만 대립각도 만드는 매우 자유로운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25일에는 한국 학자들이 조선시대 사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박사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이 같은 사족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조선 지식인 집단은 관료집단보다 더 큰 범위를 가진 집단이자 자체적인 윤리적 판단 기준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정재훈 경북대 교수도 ‘조선중기 사족의 세계관’에서 16세기 들어 역사적 존재로서 사족이 처음 등장했고, 이들은 ‘소학’을 중시하고 성리학을 내면적으로 실천하는 한편 향약을 시행하면서 지배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mail 최현미 기자 / 문화부 /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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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립 잡기노트]양반 탓 혹은 덕, 유례없는 유교국가
    뉴시스 2015.04.22
    500년 긴 세월 동안 역사적 실체를 유지한 조선 왕조의 힘은 사족(士族)에게서 나왔다. 관직에 진출해서는 국가를 경영하는 관료, 낙향해 있을 때는 지역사회를 지배·운영하는 주체로 활동했다.

    혈연이 바탕인 신라의 골품귀족이나 고려의 문벌귀족이 아니다. 지식을 기반으로 힘과 지위를 획득했다. 이전의 중앙귀족들과는 생활방식이 달랐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향약과 서원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방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6세기 이후 사족 지배체제는 그렇게 구축됐다. 이상을 구현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조선을 건설하려 했다. 사족들에 의해 건설된, 사족들의 사회가 조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이들 사족은 국가나 피지배층인 상민 또는 천민들과 끊임없이 연관을 맺으며 살았다. 자신들이 추구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국가차원뿐 아니라 향촌사회에서도 실현했다. 이윽고 18세기 이후 조선사람 대부분은 유교적 이념을 체화하면서 유교적 생활방식을 경험하게 됐다.

    조선의 유교화는 사족이 주도했다. 조선의 역사를 변화시킨 주체가 바로 사족이었다.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중국은 군현제의 틀 속에서 봉건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했고, 일본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부각되는 데 반해, 조선은 군현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돼 봉건제를 주장하는 입장 자체가 나올 수 없었다”고 특기한다. 앤더스 칼슨 영국 런던대 교수는 “(사회구조와 국가적 법 시스템이 긴밀하게 엮인) 조선의 법체계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법뿐만 아니라 사족과 국가 사이의 관계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선주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사족이 없었다고 알려진 평양 지방을 분석, 서북의 지역 엘리트들이 “다른 지역의 사족들이 공유하고 있던 사족 문화를 실행에 옮겨 사족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또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밝힌다. 황공바 베트남 후에대학 교수는 조선의 사족과 17~19세기 례 왕조와 응웬 왕조를 비교, “당시 베트남의 지배층은 외적과 투쟁을 통해 성장한 경우와, 귀족의 혈족이나 친족 그리고 과거 시험 합격자로 구성됐다”고 제시한다. 주로 유교적 소양과 지식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조선의 사족과는 사뭇 다르다.

    이정철 박사(한국국학진흥원)는 “조선시대 사족은 16세기 들어서 이전의 사대부 유형과 구별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등장했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처음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 집단이 관료집단보다 더 큰 범위를 가진 집단이자 자체적인 윤리적 판단 기준을 갖춘 집단이 됐다”고 본다. 이들이 ‘소학’을 도구로 삼아 절의 개념을 특정한 인간형에 대한 일관된 논리적 규정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정재훈 경북대 교수 또한 “‘소학’을 중시하면서 성리학을 내면하고 실천했으며, 향약을 시행하면서 지배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됐다”고 짚는다.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조선 전기 양천제 신분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이 조선에 들어와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양인이 될 수 없으며, 15세기 조선에서만 특권적 지배층이 없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정진영 안동대 교수는 사족과 농민의 관계를 분석, "한편으로는 대립·갈등하지만 서로 의존하는 호혜적 관계”라고 설명한다.

    한국국학진흥원·경북대 사학과 BK21 플러스사업단·조선시대사학회는 24~25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지역엘리트, 사족’을 주제로 조선 사족의 삶과 국가 간 관계, 민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기원, 세계관, 농민과의 관계 등을 주제로 국내외 학자 12명이 조선 사족의 실체에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한다.

    한국국학진흥원 측은 “중국의 학문인 주자의 성리학을 실천이념으로 받아들인 사족들은 이를 조선의 학문으로 토착화하면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역사적 공동체인 조선을 유교적 사회로 건설·유지했다”고 정리했다.

    편집부국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