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현풍 사직단에 세워진 달성군 충혼탑

시골(是滑) 2016. 12. 6. 16:58

현풍 사직단에 세워진 달성군 충혼탑

달성군 충혼탑은 현풍버스정류장 뒤에 옛 사직산에 위치해 있다.

이 탑은 1962년 재향 군인회 달성군 연합분회의 주관으로 당시 달성 군수 김옥현이 추진 위원장이 돼 마련됐다. 이곳은 달성군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1,400여명의 전몰군경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신년 초나, 현충일 등에는 달성군내 각 기관장과 유족 학생 일반 군민이 모여서 참배 헌향하는 행사를 거행한다. 그 후 마용수, 석진후, 박경호 군수 재임시 군비를 투자하여 전국 제일가는 충혼탑으로 가꾸었다. 2009년 이종진 군수 시절 충혼탑 공원화사업을 완료하였으며, 김문오 군수 때 이르러 주택 배면 급경사지에 노출되어 붕괴우려가 높은 현풍 충혼탑 주변 급경사지에 대하여 항구적인 재해예방을 위하여 위험건물 26동을 이주시키고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다.

원래 이곳은 사직산이라 불렸다. 조선 시대 사직단이 있던 곳이다. 사직단은 임금이나 지방 수령이 백성을 위해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보통 도성이나 동헌(관아)의 서쪽에 위치한다. 서울에서는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꾸조오례의에 의하면, 지방에서는 사직단 단을 하나로 한다고 한다. 국토(토지)와 오곡(곡식)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현풍 사직단 안내문에 의하면 현풍 사직단은 세조 14(1469)경 당시 현풍현감인 채석견(蔡石堅)이 유가면 가태리에 있던 포산 동헌을 현풍초등학교 자리로 옮기면서 현서(縣西, 현의 서쪽)에 설치하였다. 1469년이라는 해가 어떤 기록에 나오는지 궁금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사직단은 현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의 사직단은 옛 현풍 사직단 터에 충혼탑이 세워져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지 못하고 19961월 현 위치인 상리체육공원 내에 사직단을 1차 복원하였고, 20106월에는 지역유림의 주선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옛 문헌(文獻)의 고증(考證)과 지방사직단 관련 자료의 검토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 복원하였다.

현풍 사직단은 순종 2(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를 지었던 것을 19451월 애국지사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와 관련하여 애국지사 곽종해(郭鍾海, 18911946)의 공훈록이 눈에 들어온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의하면, 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0년 현풍청년회에서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워싱턴 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자유지를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성하리에서 올해 86세 된 6.25 참전 유공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지 사람인데 조요(징용) 가기 싫어서 집에서 분탕질을 지기고 신사를 불렀단다. 당시 곽종해는 지금의 탑 마트 자리에서 현풍물산, 요즘 말로 도정공장을 하였다. 곽종해를 비롯하여 증언자도 집이 신사 밑에 있었는데 주재소에서 나와 모두들 벌벌 떨었다. 당시 곽종해는 요즘 말로 하면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그때 곽종해의 집이 지금도 남아 있고, 묘소는 충혼탑 밑에 있다가 대전 현충원으로 옮겼다. 연세가 많음에도 말씀이 또렷하였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42년판)에 의하면, 곽종해는 산십종해(山十鍾海), 194123일 현풍면 하동 246에서 자본금 10만원으로 설립된 정미업체인 현풍물산()의 대표자였다. 일제 말기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현풍 곽()씨는 성을 산십(山十)으로 바꾼 모양이다. 중역들의 이름이 이사 金村甲珍, 木戶景始, 松田允元, 嚴翼周, 大成星得, 감사 金山命巖, 松浦壬得 등 일본식으로 나오나 모두 조선 사람으로 여겨진다. 엄익주라는 이름이 보이는 걸로 보아 성씨를 바꾸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풍초등 백주년사에 의하면, 현풍초등학교 17회 곽무곤1928425일 순종 황제의 기일을 맞아 11시경 5, 6학년 남학생 전원이 사직산에 모여 북쪽을 향해 꿇어 앉아 엄숙한 마음으로 참배하였다고 한다. 30분쯤 지나자 일본인 교장과 한국인 이형근 교사가 올라와 데려 가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자 두 사람도 북쪽을 향해 꿇어 앉아 참배하였다. 존경하던 이형근 선생이 점심시간도 되었고 오후 수업도 해야 하니 내려가자 하여 내려왔다. 한편, 6학년 담임 니시다 우츠우미(西田內海)는 수업도 하지 않고 집에 가라 한 뒤, 다음 날 우리 학교 역사에 씻지 못할 더러운 이름을 남겼다는 말을 남기는 등 크게 충격을 받아 여름 방학 때 학교에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하였다. 1928년 당시 6학년은 남학생 56, 여학생 7, 전교생 386명이었다. 남녀 학생은 분반되어 있었고, 여학생들은 1-3학년, 4-6학년이 한 반에서 수업하였다. 증언 당시 곽무곤은 94세였다.

일본 신사가 세워진 시기가 궁금하다. 1931년 발간한 달성군지에는 해안면에 금동사(琴東社), 수성면에 조명신사(照明神社)와 함께 天水神社가 있었던 모양인데 天水神社는 어디 있었는지 표시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