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의 신천을 그리며
2002년 <대구교육>에 쓴 글이 있어 올린다.
추측컨대 사람들은 이 하천을 우리말로 ‘사이내’, 혹은 ‘샛내’, ‘새내’라 불렀을 겁니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간천(間川)’이 아니라 ‘신천(新川)’으로 하면서, 이후 사람들은 한자어의 뜻대로 ‘새로운 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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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름다운 시절
<대구교육>에 신천과 관련된 답사기를 적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너무나 쉽게 승낙한 게 후회가 됩니다. 그냥 그렇게 아름답다고, 신천의 물이 맑아져 좋다고, 뭐 그런 얘기나 하면서 신천의 유래와 이서란 인물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천은 그렇게 가볍게만 다룰 문제가 아니더군요. 무엇보다도 산업화 이전에 대구에서 태어나 살면서 신천에 멱도 감아봤던 분들이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야만 그 동안 신천이 어떻게 변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를 제대로 쓸 수 있지요.
신천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공제비’가 되겠지요. 그리고, 1960년 ‘2.28 학생 의거’도 생각이 나는군요. 고등학생들이 일요일에 수성천변 야당의 대통령 유세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등교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터진 우리 지역의 자랑스런 민주 의거 말입니다. 4.19보다 앞서 3.15 부정 선거에 저항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요. 또 생각나는 것은 신천대로와 신천동로를 놓으면서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웠던 신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 개발과 환경 보존을 놓고 많은 논쟁이 오고갔던 것도 사실이지요. 요즘은 대구시 당국이 ‘솔라 시티’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마치 국제적인 ‘환경 도시’로 선정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 환경 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지요.
며칠 전 저녁 무렵 신천을 찾았다가 벤치에서 여고생들과 신천의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그네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상동교 근처에서 반 아이들 전체가 물고기를 잡으러 들어간 적도 있었다더군요. 전에도 운동 시설이 있고 하였지만, 그 때보다는 지금의 신천이 좋다나요.
30, 40년 전의 신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여름이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고산골이나 용두방천에서 멱을 감았답니다. 지금의 동신교 근처는 물이 깊어 튜브 끼고 수영하였다고 하는군요. 그 때의 신천은 내가 깊고 맑았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많았답니다. 겨울이며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기도 했겠고, 정월 보름이며 불놀이도 즐겼겠지요. 우리들의 시골 동네 내들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또 그 때는 신천변 자갈밭에 큰 드럼통을 걸어놓고 빨래를 삶아주는 곳도 있었답니다. 학교 다녀와 집에 아무도 없으면 신천변을 따라 올라 가며 빨래하는 어머니를 찾아다니곤 했답니다. 또 그 시절에는 신천변에 군부대가 있어 군인들의 녹색옷이 철조망에 널려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시절’에 나오는 장면처럼 말이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 그 때는 일상이었겠지요.
그보다 더 옛날 신천변에 살던 대구 사람들, 그 때도 날씨가 풀리면 아낙들은 빨래하고 개구쟁이들은 멱을 감으며 물고기도 잡았겠지요. 무엇보다도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었던 시절 농부들은 이 내에서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겠지요. 지금은 그 때의 논밭이 도로가 되고 빌딩이 되었지만 말이지요. 그 때는 신천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겁니다. 그 넓은 유로를 따라 신천은 조용히 흘렀을 겁니다. 봄가뭄에는 그 물길이 뱀처럼 흘러내렸을 것이고, 여름 장마 때는 용틀림처럼 내를 가득 채워 흘렀겠지요. 가끔은 물이 넘쳐 주변 농경지를 덮기도 하였겠지만, 큰물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하천의 폭이 넓었겠지요. 대구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작지가 확대되면서 신천은 그 폭이 점점 좁아졌을 겁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신천의 양쪽 둑이었던 곳에 큰 도로를 내는 바람에 그 폭이 형편없이 좁혀졌지요.
2. 세느강과 퐁네프의 연인
대학 시절 대현동에서 잠수교를 건너 칠성 시장을 가노라면 심한 악취가 나 코를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신천의 물은 자주 말라 있었고, 주변에는 무성한 잡초들 사이로 쓰레기도 많아 보였습니다. 별로 아름답지도 내세울 것도 없는 이 신천을 두고, 한 선배는 도시의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경대교 위에 서서 얘기했습니다. “저 아래 흐르는 물이 세느강이라 생각해 봐. 이 다리는 퐁네프의 다리인 거지.” 그 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것이 있어 이 말이 다시금 생각나더군요. 세느강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인터넷을 통해 보니 배를 타고 다리 아래로 여행하는 모습들이 보이더군요. 그 세느강만이야 하겠습니까만, 삭막한 산업 도시 이 대구에서 그래도 세느강과 퐁네프의 다리를 얘기할 수 있는 게 멋진 거지요. 그 무렵 언젠가 도청교 아래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내 건너 침산동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치 폭포수처럼 ‘콸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더군요. 코는 불편했지만 눈과 귀가 즐거워 얼마동안 바라보다가 돌아왔지요.
지난 겨울 경북대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자가 운전을 하는 경우 늘 송현동에서 앞산순환도로와 신천대로를 거쳐 경북대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몇이 어울려 다른 이의 차에 얹혀오는 날이 있었습니다. 어둠 내린 북문을 빠져 나오면서 그이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름다움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신천동로를 타더군요. 그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그이에게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천대로와는 달리 신천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고, 다리 위, 도로변의 가로등과 물 위에 반사되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또한 겨울 물 위에 비친 가로등 불빛은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집디다. 이후 저는 이 길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서 개나리가 노란 꽃을 피우더니 요즘은 푸른 잎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산순환도로를 거쳐 신천동로를 달리면, 차창으로 보이는 광경들이 계절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차리게 합니다.
최근 시내 곳곳을 다니다 보면 인공 폭포와 분수대 및 공원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신천도 늘 물이 가득한 것이 차창으로 보기에는 매우 깨끗해 보입니다. 보를 설치해서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쏟아내려 신천 바닥을 청소한다고 하는군요. 또한 신천 곳곳에 설치된 분수대에서는 사시사철 물을 내뿜어주어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 늘 떠나고 싶어했던 회색 도시 대구가 이제는 푸른 도시로 바뀌고 있는 듯합니다.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 오리, 높이 내뿜는 분수, 보를 넘쳐 떨어지는 물소리, 여유롭게 산책하는 젊은이들, 신천변을 달리는 시민들, 농구를 즐기거나 벤치에서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요즘의 신천은 십여 년 전 혹은 그 옛날의 신천이 아닙니다.
3. 대구천과 금호강 사이를 흐른 하천
정월 대보름 무렵 신천 동로를 지나다보니 ‘판관 이공 추모제’ 행사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렸더군요. 이서(李漵)라는 분은 대구 사람들을 홍수의 재앙으로부터 구한 의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구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이 분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남 녹우당을 방문했을 때 현판의 글씨가 성호 이익의 형이며, 동국진체를 계발하였던 옥동 이서(1662~?)의 글씨라는 글을 읽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돌아와 알아보니 대구판관 이서와는 시기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서라는 분이 신천으로 물길을 돌려 오늘날의 신천이 새로 생겨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천(新川)을 한자로 쓰면 자연스럽게 ‘새로 생긴 하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천은 순수한 우리말로 불렸던 것인데 이것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오해를 낳을 소지를 제공한 셈이지요. 1996년 초판의 <초등학교 대구의 생활 4-1>에서도 학생의 조사 활동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물길을 다른 곳으로 바꾸었다고 적고 있더군요.
신천(新川)은 대구 시내를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대구의 중심 되는 하천입니다. 대구광역시의 남쪽에 해당하는 달성군 가창면 팔조령에서 발원한 신천은 대구 시가지를 동서로 나누며 서북쪽으로 흘러 산격동과 침산동 북쪽 끝에서 금호강에 합류합니다.
본래 대구의 시가지를 가르며 흘렀던 큰 하천은 처음부터 현재의 신천으로만 흘렀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 가창에서 흘러 오던 물이 상동교 부근에서 물길이 양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한줄기는 현재 신천의 물길을 따라 흘렀고, 다른 한줄기는 상동교~봉덕시장~건들바위 네거리~봉산 문화거리~반월당~신명여고 동쪽~달성네거리~원대지하도를 거쳐 현재의 달서천으로 흘러 금호강에 합류하였습니다. 현재의 신천과 구분하여 이 하천을 ‘대구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대구천은 당시 대구읍성 바로 남서쪽을 스치듯 흘렀던 거지요. 그 때문에 장마철이 되면 대구천 주변의 논밭에 물이 차는 것은 물론이고 대구읍성 안에까지 물이 넘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지배층의 성역으로 공자와 유교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대구향교의 대성전마저 빈번히 침수당해 소동이 일어나곤 했답니다.
4. 제몫한 공직자
그 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신천이라고 하면 ‘새로 생겨난[新] 하천[川]’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당연히 대구판관 이서를 떠올리게 된 것 같습니다. 이서라는 분은 단지 상동교 근처에 둑을 쌓아 대구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길을 막음으로써 그 수량을 줄였고, 대구의 주된 물줄기가 현재의 신천으로 흐르도록 한 것이지요. 이러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거지요. 당시 대구천의 폭은 길어야 100미터 정도 되었겠습니까? 또 목민관이었던 그가 개인 재산을 털어서 방죽을 쌓았다는 것은 허구이지요. 목민관이 자기 돈 써 가면서 선정을 베푼 경우는 더물지요. 오히려 주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지 않으면 다행이고 부정이라도 적게 저지르면 다행 아닌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대구판관 이서는 제몫을 한거지요. 따라서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공덕비라도 세우는 게 당연한 것이고, 지금까지 향사 지내는 것도 좋은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영웅은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고, 위인은 모든 것들에 있어 위인스럽지는 않다는 거지요. 뒷사람들이 덧칠해서 자꾸만 신화화해 버려서 그렇지 단지 몇 가지의 업적만으로도 존경심에 금이 가지는 않는 겁니다. 아이디어 없는 고위 공무원에 비하면 “그 곳에 둑을 쌓자.” 얼마나 제 몫을 한 사람입니까.
암튼 이후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대구읍성 안은 상습적인 홍수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신천의 폭은 더욱 넓어지고, 수량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겠지요.
이후엘랑 ‘신천(新川)’을 ‘새로 생겨난 하천’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신천이라는 말은 이서란 분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앞선 시기에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 ‘신천 : 대구부 동쪽 4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천변에서 숱한 고인돌이 발견된 점과 과연 한 개인의 노력으로 새로운 하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해 보면, 이 하천이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새로 생겨난 하천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대구 분지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현재의 신천은 옛날 대구 시가지로 흘렀던 대구천과 동쪽의 금호강 ‘사이를 흐르는 하천’임을 알 수 있답니다.
추측컨대 사람들은 이 하천을 우리말로 ‘사이내’, 혹은 ‘샛내’, ‘새내’라 불렀을 겁니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간천(間川)’이 아니라 ‘신천(新川)’으로 하면서, 이후 사람들은 한자어의 뜻대로 ‘새로운 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몇 년 전 대구판관 이서를 기념하여 상동교 아래 둔치에 2000여 평의 작은 강변공원이 들어섰습니다. 이름하여 이서공원. 이곳에 비각을 지은 뒤 신천대로변에 있던 비석 3기를 옮겨왔습니다. 비각 안에는 1797년 세운 비와 함께, 1808년 (순조 8년)에 이전의 비가 초라해 보여 다시 세운 비가 모셔져 있습니다. 또한 1898년 대홍수 때 대구 군수 이범선(李範善)이 이공제를 4~5일만에 보수한 공을 기려 이듬 해 2월 세운 ‘이후범선비’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이서공원의 높이 10m 짜리 대형 조형물은 신천 하늘에 무지개가 뜬 형상을 표현하였다는군요. 공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덕수 이씨 종친회가 중심이 되어 이서공원에서 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덕수 이씨는 문에는 율곡 이이, 무에는 이순신을 나은 대단한 집안이지요.
보낸날짜 2002년 04월 08일 월요일0
보낸이 ooo
고맙습니다.
원고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신천에 관한 논지에 다른 분의 이의제기가 없었으면 좋으련만.
혹 보시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무방한가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편찬담당자로서 노파심으로 드리는 말씀이고 후에 나를 포함하여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한 예방책입니다.
감사합니다. ooo
대구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부
답 글> ----------------
구설수에 올라야 좋은 글 아닌가요.
아마 구설수 운운 하신 부분 중에 신천 관련 내용은 제 생각만이 아니고요, 시청 녹지과장 이정웅 선생께서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거고요.
그 속에서 상식이 점검을 받을 수 있겠지요.
읽어 보셨다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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