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대구부사>>로 번역한 손필헌 선생의 번역 글을 바탕으로 하였다.
19381129매일신보 大邱府史編纂
19400517동아일보 大邱府史 三編完成 史學的으로 貴重한 考證
최근 동북아역사논총에 실린 정상우의 논문이 있다.
정상우, 2014, <일제강점 말기 관찬 지방사에서의 지방 구현 -대구부사(1943)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제45호, 291-336쪽.
서
대구부가 일본의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700여 년 전 일본서기 진구황후(神功皇后)섭정 49년(369년)기에 보이는 도쿠노구니(とくのくに․탁국)를 지칭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는 삼한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일본과 관계를 맺은 여러 나라 가운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신라 신문왕 9년(689년)에 왕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한 적이 있었는데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이미 대구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사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서나 대구가 남조선의 웅도로 중요시 되어, 혹은 정치도시로 혹은 경제도시로 혹은 군사 도시로 발전되어 왔음은 사실이다.
대구부사는 말할 것 없이 대구의 발전과정을 찾아 첫째, 대구 인물의 향토사로서, 둘째 행정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해 엮은 것이다. 이제 그 편찬사업의 경과를 뒤돌아보면, 1935년(쇼와 10), 당시의 가도와키(門脇) 부윤은 조선총독부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씨의 자문과 그의 지휘 아래 문학사 시게요시(重吉) 촉탁을 조수로 삼고 사료 수집을 개시하였다. 이어 후루이치(古市) 부윤 때는 편집 방침을 다시 세우고, 경북공립고등여학교장 시라카미 주키치(白神壽吉) 씨,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치다 료사쿠(藤田亮策) 씨 등의 주선으로, 경성제국대학 교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씨를 주임으로 하고 문학사 하루야마(春山, 이인영) 촉탁을 조수로 하여 편찬을 개시하였다. 또한 이 사업은 스기야마(杉山)․야마모토(山本) 두 부윤 때도 계속 진행하여 원고가 거의 완성되어 일부는 인쇄되기도 했으나, 시국의 변전에 따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43년(쇼와 18) 3월, 뜻하지 않게 본인이 대구부윤으로 부임하게 됨에 부사 사업의 완성이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을 알고서 이의 완성을 독려하여 이제 겨우 대구부사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미흡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으나 여러분의 큰 질타에 힘입어 후일의 수정, 증보로 완벽을 기하고자 한다.
이에 출간에 앞서 이상의 편찬 경위를 간략하게 밝히고 아울러 이 일을 위해 많은 지도와 원조를 아끼지 않으신 부회의원 및 그 밖의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서문에 가름한다.
1943년(昭和 18) 3월 일
대구부윤 우에노 히코하치(上野彦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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