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비슬산의 두 성인, 관기와 도성

시골(是滑) 2015. 1. 27. 07:48

2012. 2. 5. 일.

비슬산의 두 성인, 관기와 도성

오랜 옛날부터 대구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다 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다. 대구의 인물을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인물은 아마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일 것이다.

 

비슬산(포산) 일대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1206~89)이 1227년이래 30여 년을 머물면서 고려후기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주도하면서 교권을 장악하였던 곳이다. 비슬산은 일연에게 《삼국유사》의 자료 수집은 물론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준 곳이다. 일연은 이곳에 전해 오는 두 성인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포산은 소실산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 ‘소슬’을 일컫는 것이라면 이는 산이 높이 솟아 있음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고 그렇다면 닭머리에 솟은 벼슬을 뜻하는 비슬과 의미가 서로 통하는 말이 된다. 또한 나뭇잎으로 옷을 삼아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데서 포산이라 하였다지만 쌀 ‘포’자이니 ‘쌀산’이 ‘솟을 산’과 같은 음가(音價)를 갖는 것이므로 역시 ‘솟을산’이란 의미로 쓰여졌을 듯하다. 따라서 비슬산은 소슬산에서 전화(轉化)된 이름이다.(최완수, 1994, 《명찰순례(名刹巡禮)》3 용연사, 대원사.)

 

이에 <<삼국유사>> 피은(避隱, 도피와 은퇴) 편에 기록된 ‘포산이성(包山二聖)’을 옮겨 놓는다.(《삼국유사》 권 제5 피은 제8. 리상호의 북역본을 바탕으로 이병도의 역주 교감본을 참고하였다.)

신라 시대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분의 거룩한 스님[聖師]가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를 그 내력을 모르나, 함께 포산(包山)에 숨어 살았다. 지방 사람[鄕人]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 함은 인도말[梵音]이니 이는 ‘싸다(包)’는 뜻이다.

 

관기는 남쪽 고개[남령 南嶺]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바위 구멍[북혈 北穴](정병삼은 ‘북혈이 지금의 용연사의 근본터가 될 수 있겠다’고 추측하였다. 최완수, 1994, 《명찰순례(名刹巡禮)》3, 대원사, 355쪽.)에 자리 잡아 거리가 10리 가량이었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매양 서로 찾아 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중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굽히며 서로 맞이하는 것 같았다. 관기가 이것을 보고 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고 하면 또한 나무들이 이같이 모두 북쪽으로 쓰러지면 도성이 곧 왔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가 지났다.

 

도성은 그가 사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항상 고요히 앉고 하였다. 하루는 그 틈으로부터 몸이 뛰쳐나가 온 몸이 공중으로 올라가 버리니 그 간 곳을 알지 못했다. 혹은 수창군(壽昌郡, 壽城郡)에 와서 죽었다고 한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두 스님의 이름으로 그 터를 이름지었고, 모두 남긴 터[유지 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는 데 뒷날 사람들이 돌 구멍 아래에 절을 세웠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982, 고려 성종 1)에 성범(成梵)이라는 승려가 처음으로 이 절에 살면서 만일 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고 50여년 동안 부지런히 도를 닦아 특별한 조짐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현풍(玄風)에 사는 신자 20여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어다가 절에 바치는데, 매양 산에 들어가 향을 캐서 쪼개고 씻어 발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면 그 나무가 밤에 촛불과 같이 빛을 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들이 그 향도(香徒, 향을 바치는 무리)들에게 시주(施主)하여 ‘빛을 얻는 해’라 하여 축하하였다. 이는 두 성인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악신 岳神]의 도움이라고 한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이니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아 발원 맹세를 하고 산중에서 1,000명의 출가(出家)를 기다려 남은 과보[여보 餘報]를 받게 된 것이라 하였다.

 

지금 산중에는 아홉 성인이 남긴 행적이 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관기, 도성, 반사(㮽師), 첩사(?師), 도의[道義, 백암터(栢岩基)가 있음], 자양(子陽), 성범(成梵), 금물녀(今勿女), 백우사(白牛師) 등이었다. 찬미하는 시에 이르기를

 

‘달밤에 거닐어 산수를 즐기던,

두 분 늙은이의 풍류 생활은 몇 백년이던고,

산골 속에 자욱한 안개며 고목들은,

흔들흔들 찬 그림자 아직도 날 맞는 양.’

 

 

‘반(㮽)’자의 음은 반(般)이니 우리말(방언 邦言)에 비나무(우목 雨木)이라 이르며, ‘첩(?)’자의 음은 첩(牒)이니 우리말로 갈나무(가을목 加乙木)이다.

이는 두 분 스님이 오랫동안 바위 너덜(암총 巖叢)에 숨어 살면서 인간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옷을 삼아 추위와 더위를 넘기며 비를 막고 앞을 가리웠을 뿐이니 이 때문에 포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듣건대 일찍이 금강산(풍악 楓岳)에도 이런 이름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로써 옛날 은거한 인사들의 숨은 취미가 대개 이와 같다. 그러나 본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면서 두 스님이 남긴 아름다운 행적에 관한 기록이 있기로 지금에 이를 함께 기록한다.

 

‘붉고 누른 풀 엮어 앞을 가리우니,

해어진 나뭇잎 옷이요 길쌈한 베 아니더라.

바윗돌 위 앙상히 여윈 소나무뿐인데,

해 저문 숲 속으로 나뭇짐 돌아오네.

한밤중 달빛 향해 도사리고 앉으매,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대로 반남아 날도다.

거적자리에 가로누워 단잠 들자니,

꿈속에도 티끌 세상 갈 바 있으랴.

두 암자 빈터에는 구름만 오락가락,

사슴은 오르건만 인적은 드물러라.’

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1>>, 영한. 초고 128-129쪽

 

이전에 향토사교육연구회에서 펴낸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1>>(2002, 영한, 128-129쪽)을 펴 본다. 두 쪽으로 줄이기 위하여 일연이 찬한 글을 네 줄만 싣고 뒤는 버렸다. 공동 작업의 허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을 찾아보니 네 줄만 있다. 또 한 방! 그럼, 동람을 참고한 셈이다.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찬을 쓴 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원고를 쓰기에 바빴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운기의 글과, 문경현의 번역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멋진 사진을 위해 유가사 입구의 일연 시비가 필요하다. 앞면이 아니라 뒷면이다. 뒷면에 번역문이 있으니.

 

 

 

 

 

 

 

 

 

 

 

 

 

그리고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과 [성보박물관소장본(범어사소장본) 보물 419-3호]을 대조하는 사진도 필요하다. 삼국유사역주와 관련하여 정문연에서 북역은 아예 참고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쉬운 우리말 번역의 묘미를 보게 하는 데 말이다. 북역과 관련되는 사진집도 있다.

【고적】 포산(苞山) 신라(新羅)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스님이 포산(苞山)에 은거했는데 서로 10여 리쯤 떨어져 있었지만 자주 만났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으로 구부러졌고 관기(觀機)가 도성(道成)을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누웠다. 뒷사람들이 시로써 찬미했다. “서로 찾아 달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니, 두 늙은이의 풍류(風流)가 몇 백 년이나 되었는가. 구렁에 가득 찬 연기와 안개 고목(古木)에 남아 있어, 구부렸다 일어서는 찬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하였다. 유가사(瑜伽寺) 비슬산 밑에 있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절 하나 연하(煙霞) 속에 무사하게 서 있으니, 어지러운 산 푸른 물방울 가을빛이 짙었네. 구름 사이 끊어진 돌층계 6, 7리요. 하늘 끝 먼 멧부리는 천만 겹일세. 차 마시고 솔 처마 쳐다보니 반달이 걸려 있고, 독경 무르익는 풍탑(風榻)에 쇠잔한 종소리 들리네. 흐르는 냇물은 옥띠[玉帶] 띤 손을 웃겠지, 씻고 싶어도 씻어지지 않는 게 세속의 먼지.”라고 하였다.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 현의 서남쪽에 있다. [동국여지승람]

 

 

포산에 은거한 관기ㆍ도성의 두 스님

신라 때 관기(觀機)· 도성(道成) 두 명의 뛰어난 스님이 있었는데,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나, 함께 포산(包山)에 은거하였다. (향(鄕)에서 소슬산(所瑟山)이라 이르는 것은 범어의 음으로 이것은 포(包)를 이야기한다.) 관기의 암자는 남쪽 고개였고, 도성은 북쪽 굴에 거처하였다. 서로 10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읊으며, 매일 서로 친하게 지냈다. 도성 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곧 산 속에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구부려, 서로 맞이하는 사람 같았다. 관기는 그것을 보고 [도성에게] 갔다. 관기 가 도성을 만나려 하면, 곧 또한 그것과 같아서 모두 북쪽으로 쏠리니, 도성은 이에 [관기에게] 이르니, 이와 같음이 몇 해였다. 도성은 사는 곳 뒤의 높은 바위 위에서 항상 참선하였다. 하루는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 사람이 뛰어나오니, 온 몸이 하늘에 올라 날았는데, 다다른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말하길, “수창군 (壽昌郡) 지금의 수역군(壽域郡)에 이르러 몸을 버렸고,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譯註 001 경상북도 현풍의 琵瑟山. 苞山으로도 쓴다(≪琵瑟山 一名 苞山 在縣東十五里 亦見星州密陽昌寧」 ≪東國與地勝覽≫ 권27 玄風縣 山川條).

譯註 002 地誌云, 神僧觀機道成 居苞山南北 兩師有意相激 則山中草木隨之而偃 禪林靈蹟之著於玆山者 其來尙矣(任守幹, 「龍淵寺重修碑序」, ≪朝鮮寺刹史料≫ 상, 408쪽).

譯註 003 자전적인 뜻은 ‘편안히 쉬고 있음’이나 여기에서는 坐禪을 뜻한다.

譯註 004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에는 주를 달아 ‘城’로 표시하고 있으며, 동경제국대학 영인본ㆍ속장경본ㆍ조선사학회본ㆍ이병도 역주본ㆍ이재호 역주본ㆍ권상로 역해본에도 모두 ‘城’로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수역군(壽域郡)이 아니라 ‘수성군(壽城郡)’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두 스님으로 그 터를 이름 지었는데, 그 자리가 모두 남아있다. 도성의 바위는 높이가 수 장(丈)이며, 후세 사람이 굴 아래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스님 성범 (成梵)이 처음 이 절에 와서 살다가,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고, 50여 년을 정성을 다하니, 자주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다. 이 때 그윽한 기질의 신의 있는 남자 2십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고,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다. 매번 산에 들어가 향(香)을 채취하여 쪼개고 씻어, 발 위에 펼쳐 놓으니, 그 나무가 밤에 이르면 빛을 내어 촛불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들이 향도(香徒)에게 크게 시주하고, ‘빛을 얻은 해’라고 경축하니, 이것은 두 성인의 영적인 감응이며, 혹은 산신에게 도움 받은 바라고 하였다. 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의 시대에 부처님의 당부를 받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이 있어, “산 속에서 1,000인이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려 남은 보(報)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산 속에서 일찍이 아홉 성인을 기록하였는데, 남겨진 이야기는 상세하지 않으나, 말하길, “관기(觀機), 도성(道成), 반사(㮽師), 첩사(牒師), 도의(道義)[백암사(栢岩) 터가 있다.] 자양(子陽), 성범(成梵), 금물녀(今勿女), 백우(白牛) 스님이다.”

註 001 두 스님의 이름으로 그 터가 전한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두 사람의 자취가 觀機가 머물렀던 암자(觀機庵)는 관기봉 남쪽에 道成이 머물렀던 처소(道成庵)은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다. 관기봉은 천왕봉의 남쪽 4㎞밖에 돌출한 바위 봉우리이다. 그 아래에 관기암 절터 흔적만 남아 있다. 도성암은 유가사 소속 암자로 현존한다. 도성암 뒤편에 도성이 연좌한 것으로 전하는 도통바위가 우람하게 서 있다. 도성암에서 관기봉은 마주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이하석,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1995, 257쪽).

譯註 001 송 태종의 연호로 976년~983년에 사용하였다.

譯註 002 太平興國은 北宋 太宗조의 연호로 982년 고려 성종 원년에 해당된다.

譯註 003 彌陀는 阿彌陀佛의 약칭이다. 彌陀道場은 阿彌陀佛을 본존불로 섬기고, 수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譯註 004 佛事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무리. 여기서는 불사에 쓸 향나무를 채취하기 위해 모인 무리를 말한다.

譯註 005 포산의 岳神으로 護佛的 善神이다.

譯註 006 過去 7불의 하나. 현세계에서 인수 2만 세 때 출세하여 正覺을 이루었다. 釋迦佛의 바로 앞에 나타난 부처이다.

譯註 007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 사람이다.

譯註 008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 사람이다.

譯註 009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사람이다. 동명의 고승으로 迦智山 禪派의 제1세 祖師 道義와는 동명이인이다.

譯註 010 栢岩寺는 도의가 주석했던 苞山에 있던 절 인 듯 하나,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譯註 011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 사람이다.

譯註 012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 사람이다.

譯註 013 신라의 승려로 포산9성의 한 사람이다.

주제분류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이름> 성범, 정성천왕,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삼국유사 > 卷 第五 > 제8 피은(避隐第八) > 포산이성(包山二聖) > 찬하여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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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 第五

제8 피은(避隐第八) 포산이성(包山二聖)

讃曰相過踏月弄雲泉二老風流㡬百年滿壑烟霞餘古木仾 [校勘 001] 昻寒影尚如迎㮽音般郷云雨木첩(木+牒)音牒郷云加乙木此二師久隠嵓叢下交人世皆編木葉爲衣以度寒暑掩濕遮羞而已因以爲號甞聞 楓岳 亦有斯名乃知古之隠倫之士例多逸韻如此但難爲蹈襲子甞寓 包山 有記二師之遺羙今并録之紫茅黄(祝+土)精肚皮蔽衣木葉非蚕機寒松颼颼石犖确日暮林下樵 蘇歸夜深披向月眀㘴一半䬃䬃随風飛敗蒲横卧於憨眼夢魂不到紅塵覊雲逰逝兮二庵墟山鹿恣登人跡稀

찬(讚)하여 말하길, “서로 지나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에서 놀다가, 두 노인이의 풍류(風流)는 몇 백년이던가. 골짜기 안개가 가득하고 노을에 고목만 남았는데, 굽혔다 폈다 쓸쓸한 그림자가 여전히 맞이하는 듯하다.”

‘반(㮽)’은 음이 반(般)이고, 고향에서 이르기를 피나무(雨木)이고, 첩(木+牒)의 음은 첩(牒)인데, 고향에서 이르길 갈나무(加乙木)이다. 이 두 스님은 오랫동안 바위에 모여 은거하고, 인간 세상과 교류하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하고, 추위와 더위를 넘어서서, 젖은 것을 가리고 부끄러운 것을 막을 뿐이었다. 이로 인하여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풍악(楓岳)에서 또한 그 이름이 있다고 들으니, 이에 옛날 세상을 피한 선비로 알고 있으니, 이와 같은 취미의 예가 많으나, 다만 본받아 따라 하기는 어렵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무를 때, 두 스님의 남겨진 미덕의 기록이 있어, 지금 아울러 그것을 기록한다.

시(詩)

자줏빛 띠풀과 죽대 뿌리로 배를 채우고, 덮는 옷은 나뭇잎으로 하여 누에치는 베틀은 없네. 쓸쓸한 솔바람 부는 돌산에서, 날 저문 숲 아래서 나무하고 돌아오네. 밤이 깊어 달을 향하여 밝은데 앉으니, 쌀쌀하여 바람 따라 반쯤은 날듯하네. 헌 포단에 뒤섞여 누워 천진하게 잠드니, 꿈 속의 넋이 속세의 굴레에 도달하지 않는다. 구름처럼 놀다 간 두 암자의 터는, 산 사슴만 제멋대로 오르고 사람의 발자취는 드물구나.

 

譯註 001 여기서는 讚曰의 찬자를 은연중에 一然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東國與地勝覽≫은 '後人 讚曰 相過踏月弄雲泉 …'(권27 玄風縣 古蹟 苞山條)이라고 하여 찬자를 막연히 후인이라 하고, ≪朝鮮名勝古蹟≫은 '徐居正詩曰 相過踏月弄雲泉 …'이라고 하여 서거정으로 명시하고 있다.

譯註 002 ‘迎’이 권상로 역해본에는 ‘延’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맞이하는 듯하다’를 ‘늘어져 있다’로 바꿔 해석할 수 있다.

譯註 003 ‘㮽’은 동경제국대학 연인본ㆍ속장경본에는 ‘搬’으로 되어 있다.

譯註 004 일연은 고종 14(1227)년 겨울, 選佛場에서 上上科에 오른 뒤 포산의 寶幢庵에 가서 禪觀을 닦으며 머물러 있었다. 同王 24(1237)년 여름, 포산의 妙門庵을 거쳐 無住庵에 주석하여 佛語를 參究하여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譯註 005 포아풀과의 다년초, 根莖은 약용, 잎은 지붕을 인다.

譯註 006 죽대 뿌리, 脾胃를 돕고 원기를 더하는 약으로 쓰인다.

譯註 007 ‘蔽’의 경우, 일본동경제국대학 연인본ㆍ속장경본의 주에는 ‘敝’가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헤진 옷’으로 해석할 수 있다.

譯註 008 나무를 찍고 풀을 베는 일을 말함.譯註 009 ‘憨’은 조선사학회본ㆍ이병도 역주본에는 ‘愍’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천진하게’를 ‘근심하며’로 바꿔 해석할 수 있다.

주제분류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지명> 풍악, 포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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