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대구도호부사 1601년(선조 34년) 9월 이시발 가선대부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시골(是滑) 2015. 1. 29. 06:38

1601년(선조 34년) 9월 이시발 가선대부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1601년(선조 34년) 9월 이시발 가선대부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이전에 썼던 <<새로쓴 대구역사기행 1>>을 보니 1601년(선조 34) 감영 설치와 함께 대구도호부가 대도호부로 승격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대구가 대도호부로 승격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이 무렵 어떤 근거로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고 단정하였는지 의아할 뿐이다.

<<경상도선생안>>을 보면 1601년(선조 34년) 9월부터 1604년 9월 까지 재임하였던 이시발의 직명이 ‘가선대부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로 나온다. 직전의 관찰사였던 김신원은 ‘행관찰사 도순찰사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병마수군절도사’로 ‘대구도호부사’를 겸하지 않았다.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도호부사’를 겸하였을 때 대구의 실질 행정을 담당한 이는 판관이었다.

 

 

 

 

1596년부터 1601년 사이 대구부사는 박홍장, 김준계 이흥종, 김여표, 배응경이었다. 이시발, 이시언, 유영순이 ‘대구도호부사’를 겸하였던 1607년까지, 대구판관은 이시정, 조홍립, 정영국, 윤후, 조정, 김인 들이 재임하였다. 1607년(선조 40) 감영이 혁파되어 정석호는 ‘가선대부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로 재임하였으며, 대구부사로는 안극효를 거쳐 정경세가 부임하였다.  

 

 

1992년 <<달성군지>> 270쪽의 선생안을 보면 안극효가 나오지만, 박대현 번역 <<대구읍지>>에는 안극효가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는 선조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2월 6일(기해)에 안극효(安克孝)를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삼은 기록이 나온다.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na_14002006_004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143년(인종 21) 대구현령 파견

1394년(태조 3) 종래의 하빈현에 수성현․해안현이 새로이 포함

1419년(세종 1) 군으로 승격

1466년(세조 12) 도호부로 승격

1601년(선조 34) 감영 설치, 감영 경비 조달 목적으로 인근의 경산현․하양현․화원현 등을 내속(來屬).

1607년(선조 40) 감영 혁파, 하양현과 경산현 독자 군현으로 분리․독립, 화원현은 다시 성주목 관할.

1684년(숙종 10) 대구에 다시 감영 설치. 성주목 화원 8개 방(坊)과 밀양목 풍각 4개면 대구부에 이속. 대구부의 영역은 대구본부와 수성현․하빈현․해안현․화원현․풍각현 등 5현 소속의 34면 포괄.

 

대구시청의 역사연표가 참고된다.

http://www.daegu.go.kr/Contents/Content.aspx?cid=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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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쓴 대구역사기행 1>>의 해당 내용에서 대도호부를 도호부로 고쳤다.

1394년(태조 3) 대구현에는 종래의 하빈현에 수성현․해안현이 새로이 포함되었다. 이 때 대구현의 속현이었던 화원현은 다시 성주목에 속하게 되었다. 1395년 수성현과 해안현은 경주에 잠시 옮겨졌다가 다시 1414년(태종 14) 대구에 속하게 되었다.

1466년(세조 12) 다시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이처럼 고을의 읍격[邑格]이 승격된 것은 결국 인구의 증가 및 이에 따른 조세 수입 증가가 반영된 결과였다. 또한 진관제도(鎭管制度)의 확립에 따라 대구진이 성립되는 등 지리․군사적 중요성이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읍격의 승격에도 불구하고 대구 본읍이나 속현의 영역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경상감영은 전란의 여파로 여러 차례 옮겨다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29년(선조 25)에 경상도를 2도로 갈라서 좌도감영은 경주에, 우도감영은 지금의 북구 칠곡 지역에 해당되는 성주목 팔거현(八莒縣)에 두기도 하였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경남 해안 지역으로 물러나면서 1596년(선조 29)에는 경상좌우도를 합하여 대구 달성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대구부가 유린되자 1599년 다시 안동으로 감영이 옮겨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601년(선조 34) 안동대도호부가 내륙 깊숙한 곳에 있어서 위치상 부적합다는 이유로 다시 대구에 감영이 옮겨졌으며,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이 때 감영의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인근의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화원현(花園縣) 등을 내속(來屬)시킨 결과 대구부는 대구본읍 및 수성현․하빈현․해안현․경산현․하양현․화원현을 포괄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약간의 변동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종2품의 경상 감사(관찰사)는 대구도호부사를 겸임하였으며, 대구도호부의 일반 행정은 주로 종5품의 판관(判官)이 관할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1607년(선조 40) 2월 하삼도(下三道, 경상․충청․전라도)의 감영이 혁파됨에 따라, 같은 해 5월 하양현과 경산현은 독자적인 군현이 되어 대구부에서 분리․독립되었고, 화원현은 다시 성주목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이후 감영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684년(숙종 10) 3월 대구에 다시 경상감영이 설치됨에 따라 성주목에 속했던 화원 8개 방(坊)과 밀양목 소속의 풍각 4개면이 대구부에 이속되었다. 이로써 이후 대구부의 영역은 대구본부와 수성현․하빈현․해안현․화원현․풍각현 등 5현 소속의 34면을 포괄하는 경상도의 정치․경제․군사․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대구도호부에 속한 5현은 대구도호부사 또는 대구판관에 의하여 관할된 지역이므로 현이라 하더라도 현령이나 현감과 같은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대구본부의 행정기구나 조직에 의해 통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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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na_14002006_004

선조 208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2월 6일(기해) 4번째기사

홍경신·최관·심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경신(洪慶臣)을 부제학으로, 최관(崔瓘)을 좌승지로, 심열(沈悅)을 병조 참지로, 박경신(朴慶新)을 형조 참의로, 박동망(朴東望)을 종부시 정으로, 허균(許筠)을 상의원 정으로, 이경기(李慶禥)를 예빈시 부정으로, 이유연(李幼淵)을 예조 정랑으로, 홍방(洪霶)을 병조 좌랑으로, 기협(奇協)을 부수찬으로, 오정(吳靖)을 병조 좌랑으로, 이경탁(李慶倬)을 전적으로, 황유중(黃有中)을 전적으로, 이준(李準)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우준민(禹俊民)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정엽(鄭曄)을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안창(安昶)을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안극효(安克孝)를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성안의(成安義)를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권춘란(權春蘭)을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