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大丘'와 '大邱' 실록원문 검색

시골(是滑) 2015. 5. 12. 13:36

'大丘'는 실록원문 검색 결과 435건으로, 태조 2건부터 시작하여 헌종 1건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는다.

헌종 7년(1841 신축 / 청 도광(道光) 21년) 9월 24일, '경상 감사 홍재철(洪在喆)이 7월 9일의 비로 대구(大丘) 등 10개 고을에서 물에 떠내려가고 무너진 민가가 4백 75호이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5명이라고 치계(馳啓)하였다.'(○乙亥/慶尙監司洪在喆, 以七月初九日之雨, 大丘等十邑, 民家漂頹四百七十五戶, 人命渰死五名, 馳啓。)

'大邱'는 실록원문 검색 결과 91건으로, 정조 2년(1778 무술 / 청 건륭(乾隆) 43년) 5월 5일 '경기·호서·영남·관동 4도의 진휼을 마치다'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 처음으로 '大邱'가 쓰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영조 72권, 26년(1750 경오 / 청 건륭(乾隆) 15년) 12월 2일(신미) 2번째기사에 의하면, 대구(大丘)의 유학(幼學) 이양채(李亮采)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이 사는 고을은 바로 영남의 대구부(大丘府)입니다. ‘휘’에 대해 아뢰면서 ‘부의 향교(鄕校)에서 선성(先聖)에게 제사를 지내 온 것은 국초부터였는데, 춘추의 석채(釋菜, 소나 양의 희생을 생략하고, 다만 약식으로 채소 따위로 간소하게 孔子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는 지방관이 으레 초헌(初獻)을 하기 때문에 축문식(祝文式)에 대수롭지 않게 ‘대구 판관(大丘判官)’이라고 써넣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구(大丘)’의 ‘구(丘)’ 자는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인데, 신전(神前)에서 축(祝)을 읽으면서 곧바로 이름자를 범해 인심이 불안하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편리함을 따라 변통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이 미안하고 공경이 부족한 탄식이 없도록 하소서.” 하자, 영조가 “아! 근래에 유생(儒生)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 3백여 년 동안 본부의 많은 선비들이 하나의 이양채 등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라며 상소를 뙤돌려주라고 명한 내용이 나온다. 대략 이 때를 전후하여 사족들 사이에는 大邱라 써는 풍조가 있었던 듯하다.

 

승정원일기에는 '大丘'가 인조 원년/ 04월/11일(경오)부터 고종 33년/ 06월/26일(경인)까지 1146건이고, '大邱'가 인조 6년/ 06월/05일(갑오)부터 고종 40년/ 07월/02일(갑신)까지558건이다. 원본을 탈초하는 과정에서 '大丘'를 '大邱'와 구분하지 않고 '大邱'라 표기하여, 승정원일기에서는 언제부터 '大邱'라 표기하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