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대구 지역 각 군현의 영속 관계 변천

시골(是滑) 2016. 12. 6. 11:17

대구 지역 각 군현의 영속 관계 변천


현재 대구 지역은 대구광역시로 묶여 있는 시ㆍ도 단위의 광역 자치 행정 단위이다. 대구광역시의 영역은 조선 후기 대구도호부와 현풍현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906년 9월 24일 대한제국 칙령 제49호 지방구역정리건에 의해 성주 비입지(飛入地) 노장곡면이 현풍군에 내속(來屬)하였으며, 현풍군의 진촌면ㆍ답곡면ㆍ왕지면은 고령군에, 대구군의 각북면ㆍ각현내면ㆍ각초동면ㆍ각이동면은 청도군에 이거(移去)하였다. 노장곡면은 달성군 논공읍 금포ㆍ노이ㆍ삼리ㆍ위천리에 해당한다. 2005년 옮겨온 달성군청 청사도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까지 성주 지역이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직할시 승격과 함께 조선 후기 칠곡도호부 팔거면ㆍ문주면ㆍ퇴천면(1914년 통합하여 칠곡면, 1980년 12월 1일 읍으로 승격), 경산현 서면(1914년부터 경산군 고산면)ㆍ북면, 하양현 안심면(1914년 경산군 북면과 통합 경산군 안심면, 1973년 7월 1일 읍으로 승격)에 해당하는 지역이 편입되었다.


삼국 내지 통일신라의 발전과정에서 중국의 군현제를 수용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던 국·성·촌이 주·군·현으로 개편되어 갔다. 그 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군현의 이름과 읍격 및 영속 관계는 끊임없이 변천하였지만, 원래 구역 자체의 분할이나 분해 작용은 극히 드물어, 옛 군현의 흔적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다(이수건).


『삼국사기』에는 “수창군(수는 가라고 한다.)은 본래 위화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수성군이다. 영현은 넷이다. 대구현은 본래 달구화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팔리현은 본래 팔거리현(한편 북치장리라고도 이르고, 한편 인리라고도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팔거현이다. 하빈현은 본래 다사지현(한편 답지라고도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이른다. 화원현은 본래 설화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 하였다. 신라 하대 대구 지역은 수창군에 군 치소가 있었고, 수창군이 主縣으로 대구현ㆍ 팔리현ㆍ하빈현ㆍ화원현을 거느렸으며, 757년(경덕왕 16) 각 군현의 이름이 고유 지명에서 중국식 지명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대구광역시에 포함되어 있는 전근대 대구 지역의 각 군현은 팔공산과 비슬산 아래 낙동강, 금호강, 신천을 경계로 각기 별개의 고을로 나눠있었다. 삼국 이래 대구ㆍ하빈ㆍ수창(수성)ㆍ해안ㆍ화원ㆍ팔리(팔거)ㆍ현풍ㆍ풍각ㆍ장산(경산) 및 특수 지역인 안심(안심소), 시지(두야지부곡) 지역은 각각 하나의 군현, 혹은 이에 상응할 정도의 지역 단위로 이어져 왔다 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광역 지방 행정 단위인 양주의 관할 아래 있었다. 양주는 양산에 주 치소를 두었으며, 대구 지역은 주 치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주의 지방 군단인 삼량화정은 현풍현에 있었다.


원래 대구현은 조선 후기 동상ㆍ동중ㆍ동하ㆍ서상ㆍ서중ㆍ달서ㆍ성서면 지역이다. 대봉동을 제외한 중구, 서구, 달서구 성서 지역, 동구 신암동ㆍ신천동 및 금호강 남쪽의 북구와 금호강 건너 북구 노곡동ㆍ조야동ㆍ무태동(동변동·서변동)이다. 조선 후기 동하면에 해당하는 금호강 건너 지역은 대구현에서 보면 월강지(越江地)인 셈이다.


신라 하대 수창군 소속이었던 대구현은 고려에 들어와, 1018년(현종 9)부터 125년간 경상도 상주목 경산부(성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43년(인종 21) 승격하여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 1419년(세종 1)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속현은 기존의 하빈현과 화원현(1143년)에 이어 1394년부터 수성현, 1414년부터는 해안현이 소속되었다. 그러나 화원현은 성주목 읍지인 『경산지』에는 1390년(공양왕 2년)에 팔거현과 화원현에 감무를 둔 기록이 나오고, ‘태종 때 경내의 조곡산에 어태를 안치하고 목으로 승격시켰을 때 대구의 화원현을 다시 성주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1401년(태종 1) 조곡산에 어태를 안치할 때 성주목에 이속되었다.


대구 지역이 1914년 이래 대구부, 혹은 대구시라 하여 대구의 도심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오다 보니, 좁은 의미의 ‘대구’를 중심으로 대구 지역의 역사를 서술해 왔다. 대구 지역을 연구한 글들을 보면 각 군현의 영속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성서 지역을 다사지현의 일부로 추정하거나, 통일 신라 시대 하빈․화원현의 일부는 상주의 지배를 받았다거나, 하빈현과 화원현이 고려 시대 내내 성주의 소속이었던 것으로 오해하여, 하빈현이 조선 초에야 대구에 합속된 것으로 보거나,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대구가 대도호부로 승격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역대 지리 정보를 정해진 규격에 맞춰 일정하게 넣다 보면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지리지 편집자들은 많은 정보를 단순화하여, 각 군현의 건치연혁을 세세하게 모두 다 넣지는 못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를 놓치거나, 잘못 옮긴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1) 신라 하대 수창군과 그 속현들은 나말여초의 격동기에도 1018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2) 하빈현은 1143년(인종 21) 대구현에 현령이 파견된 이래 줄곧 대구의 속현이었다.
3) 수성현은 고려 초기 가창도호부이나 수성군으로 개칭되기도 하였으나 독자적인 군현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1018년(현종 9) 동경유수관의 속군이 되었다.
4) 해안현은 나말여초 영천 지역의 호족 세력과 영주(영천)라는 읍격을 고려해 보면, 고려 초인 940년경 장산군에서 벗어나 1018년까지 영주 관할 아래 있었을 것이다.
5) 해안현에 감무가 파견된 시기는 공민왕 때가 아니라 공양왕 때인 1390년이다. 이때 화원현과 팔거현에도 감무가 파견된 것을 확인하였다.
6) 안심소는 수성군 소속이었으나 1018년(현종 9) 경주로 옮겨졌다가 1394년부터 하양현 소속이 되었다.
7) 수성현의 부곡이었던 두야지부곡은 조선 초기 경산현의 직촌이 되었는데, 지금의 수성구 시지와 동구 반야월 지역이 아닌가 한다.
8) 화원현도 1143년 하빈현과 함께 대구의 속현이 되었으나, 조선 건국 초인 1401년 성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9) 화원현이 1601년 대구에 이속되었다가 1607년 다시 성주목에 소속된 것을 세 차례 성주 읍격 강등과 관련지어 확인하였다.
10) 화원 8방과 풍각 4면이 대구에 옮겨온 것은 1684년이 아니라 1685년이었다.
11) 풍각현은 『경상도지리지』에 고려 초 청도 임내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 초라기보다는 밀양의 읍격이 강등되었던 1274년부터 1390년 사이 잠깐 동안이었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