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동, 화원현의 재지사족 단양 우씨
성주읍지인 『경산지(京山志)』 초고본에는 월배에 우(禹)ㆍ임(林) 두 성이 와 거주하였는데 임씨는 후손이 없고, 우씨의 후손 중에는 우봉(禹鳳)과 우붕(禹鵬) 형제가 모두 함평현감이 되었고, 우배선은 통정대부 군수가 되었는데 모두 무과 출신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단양 우씨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우배선의 고조 우전이 화원현 월촌에 정착하면서 달서구 상인동 주변이 세거지가 되었다. 우배선의 아비인 우성덕은 원래 우붕의 넷째 아들로 백부인 우봉의 양자가 되었다. 우배선의 고조 우전이 화원현 월촌에 정착하면서부터 그의 5대조묘를 비롯하여 그의 아비까지 조상의 분묘도 세거지 상인동을 중심으로 주위에 위치하게 하였다. 우배선의 가계는 본래 충청도 단양군의 토성으로 고려중기까지 본관의 읍사를 중심으로 호장을 세습해 오다가 원의 비배시기에 과거를 통해 사족화하면서 상경종사(上京從仕)하였고, 고려 말에는 문호의 극성기를 맞이했으나 왕조교체로 인해 정치적 실각을 한데다가 개국세력 정도전 등의 사감(私憾)으로 문화(門禍)를 입게 되고 인척 따라 낙남(落南)하면서 성주를 거쳐 그 속현인 화원현 월촌에 정착하였다. 낙남 이후 성주ㆍ대구ㆍ청도ㆍ현풍 등지의 재지사족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곽재우ㆍ김면ㆍ정인홍 등의 가계 및 사회경제적 기반과 비교할 때, 우배선의 경우는 대체로 한미하였다. 우배선의 전처는 태종대 우의정을 역임한 이원의 5대손 이탕의 딸이며, 후처는 김굉필의 증손인 김수열의 딸로서 전후처에 각각 아들 우달해와 우달하가 있다. 우배선은 임란 당시 24세의 젊은 서생으로 한미한 가세에서 창의, 100명 안팎의 소규모 의병진을 갖추고 화원현에서 낙동강과 금호강, 비슬산과 최정산을 무대로 왜적을 기습, 야작(夜斫), 추격 등 주로 ‘이소격중(以小擊衆)’, ‘이일대로(以逸待勞)’라는 유격전술을 구사한 결과 임진년 10월에서 계사년 5월까지 성취한 전과만 하더라도 참급 63명, 사살 604명, 작살 110명이나 되었다. 그의 의병활동과 그 의병진이 성취한 군공을 미루어 보아 임란 때 대구ㆍ성주 지방을 대표한 제일의 의병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배선(禹拜善) 1569(선조 2)∼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의병장·문신. 우배선의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 할아버지는 현감 봉(鳳)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화원·달성·최정산(最項山)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 이에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예빈시참봉에 기용되고, 계속해서 용감히 싸웠으며, 군기시판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의 거처를 모르는 조정에서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1600년 김산군수에 명하였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의 유망사태를 빚는다 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하였다가, 1603년 다시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조선실록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고인(古人)은 본토의 인재를 많이 거두어 서용하였는데 그것은 뜻이 있는 것이다. 경상도의 김태허(金太虛) 등과 같이 뛰어난 사람들은 이미 장수가 되고 혹은 수령이 되어 공을 많이 세웠다. 다만 전에 들으니 우배선(禹拜善)과 안신갑(安信甲) 같은 자는 용감하게 선전(善戰)하였으므로 명하여 수령을 삼았는데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사(有司)가 탄핵하여 내쳤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혹 관직(官職)을 제수하여 방어사나 절도사의 막하에 예속시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별장(別將)을 삼거나 혹은 선봉을 삼아서 그 용감함을 펴게 하라. 이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모두 수소문하여 등용하라."
지평 강주(姜籒)가 아뢰기를, "봉상시 정 허흔(許昕)은 인망(人望)이 가벼워 계제(階梯)의 직책에 적합하지 못하니 체차를 명하소서. 김산 군수(金山郡守) 우배선(禹拜善)은 본래 미세한 사람으로 일을 전도되고 망령되게 처리하여 일도의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므로 백성이 그 폐해를 받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이산 현감(尼山縣監) 곽열(郭悅)은 사람됨이 오활하고 옹졸하며 정사를 하리에게 맡기므로 온 경내 백성의 원망이 더욱 심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산음현(山陰縣)은 여러 차례 분탕질을 당해 더욱 심하게 잔파되었다. 현감 이보명(李寶命)은 사람됨이 추잡하여 잔파된 것을 회복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책임을 결코 감당할 수 없으니 체차를 명하고 후임자를 각별히 선택하여 차출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전라 좌도 수사 안위(安衛)가 치계하기를, "7월 3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다. 낙안 군수(樂安郡守) 우배선(禹拜善)이 치보하기를 ‘7월 3일 밤 비바람이 크게 불고 파도가 하늘에 닿았는데, 본군의 전선(戰船)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다가 높은 언덕에 걸렸다.’고 하였다. 대개 풍랑으로 인해 전선만 부서진 것이 아니라 돌이 구르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고목이 모두 뿌리가 뽑히고 각처의 금송(禁松)이 모두 부러졌다. 그리고 여염집도 모두 무너져 많은 사람이 압사하였고, 연변 각처 포작인(鮑作人)들의 집도 모두 떠내려갔거나 날아가서 간 곳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이 30여 명이나 되고 죽은 마소도 40여 마리이며, 화곡(禾穀)도 모두 물에 잠겨 손상되었다. 흥양(興陽)이나 낙안 등의 고을에서 신보한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인데, 흥양에서는 군기가(軍器家)가 뒷산이 무너지면서 쏟아져 내린 모래에 묻혀서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30부(部)가 모두 부러졌다. 전선과 군기는 전령(傳令)하여 밤낮없이 독촉하여 만들도록 신칙하였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우배선은 1601년(선조 34) 9월 1일, 3일, 4일, 6일 사간원에서 연이어 하리(下吏)들에게 정사를 맡겨 백성들의 원성이 크다는 이유로 파직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다음해 4월 윤허하였으나 선조 36년에는 낙안군수로 재직하였다.
우석규(禹錫珪) 1648(인조 26)∼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백옥(伯玉), 호는 지족당(知足堂). 단양군수 현보(玄寶)의 후손으로, 증조는 군수 배선(拜善)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여율(汝律)이다. 167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82년 창릉참봉으로 기용되어 봉사(奉事)·직장(直長) 등을 거쳐 산음현감이 되었으나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파직당하였다. 1710년(숙종 36) 지우 이만성(李晩成)이 이조참판이 되자, 그의 천거로 진천현감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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