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현풍현감 채석견

시골(是滑) 2014. 9. 13. 15:47

현풍현감을 역임한 채석견(蔡石堅)이란 인물은 “한국지명총람”과 “경북마을지”에는 세종, “현풍현 읍지”(1895)를 도표화한 “달성군지”에는 세조조로 기록하였다. 1786년 제작된 “현풍현읍지(玄風縣邑誌)”와 1899년의 “현풍군읍지” ‘환적’에는 전평원, 유덕수, 채석견, 3명만 나온다. 채석견은 ‘자손인거본현’, ‘자손인거’이라 하여 현풍현감을 한 인연으로 그 자손이 현풍현에 거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현풍초등 100주년사”에서는 현풍 사직단은 세조 14년(1469)경 당시 현풍현감인 채석견(蔡石堅)이 유가면 가태리에 있던 포산 동헌을 현풍초등학교 자리로 옮기면서 현서(縣西, 현의 서쪽)에 설치하였다. 1469년이라는 해가 어떤 기록에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채석견(蔡碩堅)은 중종실록 1507(중종 2) 5월 22일에 발견된다. 1507년(중종 2) 5월 25일치 중종실록에서는 대간이 “현풍 현감 채석견이 면화(綿花) 씨 12석을 심고 주민으로 하여금 가꾸게 하여 자기 것으로 가져다 썼으며, 또 두 사람을 사형한 일은 석견이 이미 자복(自服)했으니, 파직시켜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509년 중종 4년 2월 7일치에는 대간이 장리(贓吏) 채석견(蔡石堅)이 도망하였으니 마땅히 철저히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하자 허락하였다. 이어 9월 13일치부터는 사위인 의성 현감(義城縣監) 김석필이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장리의 사위이기 때문에 서경 받지 못한 지 50일이 차 갈리게 되는 내용이 나온다. “속록(續錄)”에는, ‘의정부(議政府) 이하 도사(都事)·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무릇 청요(淸要)한 중직(重職)은 아내의 사조(四祖)까지 고찰한다는 규정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전에 김석필은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 있을 때 임사홍의 사위인 노종(盧種)을 추천하였으나 동료들로부터 기각을 당한 적도 있고, “홍문관은 직책이 경연을 맡고 있어 김석필이 홍문록(弘文錄)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