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구마고속도로 공사 때 현풍면사무소와 초등학교 사이 비석걸에 있던 비석 35기를 비롯하여 모두 38기를 달성군민체육관 북쪽에 열 지어 놓았다가 ‘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공원화하여 관직별, 연대별로 배치하였다. 제1비석군은 순상국, 관찰사, 제2, 3, 4비석군은 현감, 제5비석군은 군수, 그리고 기타 비석군은 찰방, 참봉, 금부도사, 군 서기 등의 비석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석 안내판이나 표석을 보면, 몇 기의 연도가 잘못되어 있다. 비신안내문(碑身案內文)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한자가 많이 들어가 있어 읽을 수가 없다.
안내문에 소개된 서혜순은 서희순(徐憙淳, 1793~1857)으로 1833년에서 1844년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한자가 잘 안 보여서이지만 “경상도선생안”을 보면 서희순임을 알 수 있다. “달성의 금석문”에는 서희순으로 바로잡았다. 또한 현감 홍후우한 애민선정비(1716)를 홍우한의 뒤를 이어 현풍 현감이 된 현감 홍우이 애민선정비로 바로 잡았다. 비석의 글자를 판독하면 偁[들 칭, 稱(일컬을 칭)의 본자]로 보인다. 1786년 현풍현읍지에는 偁으로 나오며, 1899년 현풍군읍지에는 사람 인에 너 이를 합친 글자(亻+爾)로 나온다. “달성의 금석문” 연구진은 후자로 인식한 듯하다.
비석의 이름 적힌 부분이 떨어져 나가 알 수 없어 ‘영장 흠 거사비’로 되어 있던 영장 ○○○○ 거사비를 영장 [노진정] 거사비로 바로 잡았으나, 정유년을 1837년이라 하는 근거와 마모 된 부분을 노진정이라 추정하는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근필, 조강하, 엄세영, 이용익 들의 비를 각각 1841, 1844, 1838, 1845년으로 잘못 적고 있다. 또한 현감 정기태의 비 2기(1841→1874, 1874→1881), 의금부도사 이선형 비(1905→을미년은 1895 혹은 1835), 현감 오위주 비(1684→1721 세우고, 1759 다시 세움)는 연도가 잘못되어 있다.
[동치 13년 1874년 구지면 응암리 143-1번지 도로변 당시 산전면에서 세운 거]
엄세영(嚴世永, 1831~1900)은 대한제국 시기 경상북도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로 무술년은 1838년이 아니라 1898년이다. 이용익 관찰사비 또한 1845년이 아니라 1905년이다.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유명한 보부상ㆍ물장수ㆍ금광 개발업자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를 장호원에 피신시켜 출세한 인물이다. 따라서 관찰사들의 비는 서희순, 김도희, 이근필, 조강하, 서기순, 엄세영, 이용익 순이 아니라, 서희순(1841), 김도희(1841), 서기순(1851), 이근필(1881), 조강하(1884), 엄세영(1898), 이용익(1905) 순이어야 한다.
‘군수신공현구애민선정비’ 또한 연도 표기가 잘못되어 있다. 신현구(1886∼?)는 1926년 10월 15일부터 1931년 12월 11일까지 달성군수였던 인물로 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역임하였다. 이 비는 현풍번영회에서 세운 비이다. 아마 신미년을 서기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1931을 1913년으로 잘못 새긴 것이다.
나는 비석들을 관찰사와 현감 등으로 구분하지 말고 건립 연도순으로 재배치하였으면 한다. 연도순으로 배치하게 되면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비석 주인공과 달성군의 역사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연대순으로 하면 비석 모형의 변천이나, 동일 인물, 비석이 집중되는 시기 등을 살필 수 있다.
연도와 비석의 주인공을 알기 쉽게 적어 주면 좋겠다. ‘군수신공현구애민선정비’는 제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군수 신현구비’라 적고 그 밑에 ‘군수신공현구애민선정비’를 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 김후인정선정비(김세렴, 1636), 관찰사 이용익애민선정영세불망비(1905)도 그렇다. 현감 김세렴 비(1636), 관찰사 이용익 비(1905)식으로 써 주면 좋겠다.
비석과 관련하여 이야기 거리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김세렴이다. 김세렴은 인조반정 뒤 권신 이귀를 탄핵했다가 1634년 현풍현감으로 좌천된 인물로 1636년 일본에 통신사 파견될 때 부사로 따라 간 인물이다. 그의 ‘해사록(海槎錄)’ 1636년(인조 14) 9월 3일에는 통신사가 현풍현 향리들을 잡아오라는 것을 만류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병자년(1636, 인조 14) 9월 3일 흐림. 경주를 떠나 (중략) 낮에 구어역(仇於驛)에 닿으니, 현풍 현감(玄風縣監) 유여해(兪汝諧)ㆍ장기 현감(長鬐縣監) 양응함(梁應涵)이 와서 기다렸다. 현풍의 하리(下吏) 김흥룡(金興龍) 등 수십 인과 관비(官婢) 설매(雪梅) 등 수십 인이 와서 뵙고,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이에 앞서 상사가, ‘현풍 현감이 일본으로 데리고 갈 아이를 보내지 않으니, 이는 우리 사행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하여, 삼공형(三公兄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호장(戶長)ㆍ이방(吏房)ㆍ수형리(首刑吏)의 세 관속)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내가, “현풍의 하인들이 모두 옛날 현감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데, 아전들을 형신(刑訊)하여 실망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지금 현감은 곧 나와 직무를 교대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직무를 교대한 사람을 존중하였으니, 억누르고 욕보이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상사가 웃으며 나의 말을 따랐다.
김세렴, ‘해사록(海槎錄)’ 1636년(인조 14) 9월 3일
몇 년 전 옮긴 수철원교비명은 1761년(영조 37)에 세웠다. 수철원교라는 말에서 원교리라는 마을 이름이 나오게 된다. 그 공사에는 경상감사 조엄의 공이 컸던 모양이다. 조엄은 구황작물이 고구마를 가지고 온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구천(현풍천)에서 원교가 한 역할 등을 이야기하면 재미있었을 듯하다. 또한 조엄의 할아버지 조도보(1706~1708, 현풍현감 재임)와 현풍 향교를 옮긴 김광태(1755~1760)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익은 유명한 보부상ㆍ물장수ㆍ금광 개발업자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를 장호원에 피신시켜 출세하였으며,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여의치 않자 러시아 등을 상대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신현구(1886∼?)는 대구 출신으로 1926년 10월 15일부터 1931년 12월 11일까지 달성군수였던 인물로 매일신보 경북지사장, 총독부 중추원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이사장 등을 역임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신미년(1931)에 달성군수로서 한문으로 된 “달성군지” 편찬을 주도하였다. 더 살펴보면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발굴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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