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임진전쟁 이전 시기의 현풍현감(현풍읍선생안)

시골(是滑) 2014. 9. 13. 15:50

아침에 감사를 뵙고 하직 인사를 하였다. 감사는 (성주에서) 현풍으로 가고, 나는 풍기로 부모를 뵈러 갔다. (1518년 12월 26일)

정오에 현풍현에 도착하니 현풍현감 박귀령(朴龜齡, 박구령) 공이 예를 갖춰 인사하고, 훈관 성세거가 예를 갖춰 인사하였다. 그 후 유숙하였다. 밤기운에 감기가 든듯하여 약을 먹었다. 늦게 출발하였다. (1519년 1월 12일∼13일)

현풍현 오리정에 도착하니 현풍현감 박귀령은 아프다고 나오지 않았고, 초계군수 윤승서와 훈도 김승조, 창녕현감 변성과 훈도 김한광, 의령훈도 손윤창, 현풍훈도 성세거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예를 마치고 감사는 동헌에서 집무를 시작하였다. (1519년 7월 13일)

일행이 출발하여 현풍에 도착하니, 현풍현감 박귀령과 훈도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중략) 아침에 현풍현감이 들어와 이야기하였다. (1520년 1월 19일∼20일)

 

황사우가 경상도 도사로 경상도 여러 고을을 순력할 때, 현풍 현감은 박귀령이었다. 현풍훈도 성세거는 그의 아들 성열이 중종 29년(1534)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을 당시 영덕훈도였다. 1520년 1월 16일 일기에서는 영산훈도가 황사우와 동년인 성세기의 아버지라 하였다. 1507년 9월 7일 사마방목에는 진사 성세기의 아버지가 성균생원 성준달로 나온다. 성준달은 성종 11년(1480) 식년시에서 생원이 된 인물이다. 1507년 사마시 동년인 성세기의 아버지이므로 황사우가 어려워하였음은 그의 이름 적기를 피하였음에서도 알 수 있다.

족보에는 성세거의 아버지는 성식, 아들은 성열이다. 한자는 다르지만 성세기란 인물이 성세거의 동생으로 나와 영산훈도와 현풍훈도는 삼촌 조카 사이로도 볼 수 있으나, 다른 인물이다. 성세거의 할아버지는 근례인데, 성준달의 아버지는 성효건이다.

 

전 현풍 현감 박찬은 자상하고 화평하고 단아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모두 애모하였는데, 그가 안동 판관으로 갈릴 때에 현풍 백성들은 노소가 모두 울었다 합니다. 지금은 어떻게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종실록 1518년 5월 30일)

 

박찬은 전생 직장 김대유로부터 현풍현감에서 안동 판관으로 갈릴 때에 현풍 백성들은 노소가 모두 울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박찬은 1511년 4월 11일 조광조·민세정 등과 함께 예조와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온 인물이다. 이날 헌납 이언호와 지평 이빈은 민세정·박찬은 효행이 있고 나이가 거의 40이 되었으니 그래도 서용할 만하지만, 조광조는 나이 30이 못되고, 한창 학업에 큰 뜻을 두고 있어 국가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여 관직 임명을 보류하였다. 그 결과 민세정은 참봉, 박찬은 별좌가 되었다.

6월 24일 검토관 공서린이 별좌와 참봉은 어두운 밤에 권세 있는 집안에 애걸하는 자까지도 천하게 여기는 것으로 천거의 본뜻에 어긋난다. 6품직인 현감에 임명하면, 비록 작은 직이기는 하나 평소에 품었던 뜻은 펴볼 수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때 특진관 유숭조는 이 둘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민세정은 어버이께 효도할 뿐 아니라 형제간에도 우애가 좋습니다. 그 형이 일찍이 문둥병에 걸렸었는데, 의원에게 물으니 뱀고기라야 치료할 수 있다고 하므로, 민세정은 곧 뱀을 잡아서 구워 먹이니 형은 선뜻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민세정은 다시 큰 뱀을 잡아 회를 만들고 마주 대하여 울면서 스스로 먼저 먹으니, 형도 뉘우치며 먹고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누구나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박찬은 여막에 사는 3년 동안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았으며, 손수 제물을 차려 조촐하게 제사 드렸고, 또 처상(妻喪)을 당해서 홀아비로 3년을 살았으니, 이 또한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중종실록 1511년 6월 24일)

 

이때 중종은 이미 관직을 제수하였으므로 임기가 차면 즉시 옮겨 전보하는 게 옳겠다고 하였다. 그 뒤 박찬은 현풍현감에 임명된 듯하다.

그는 1516년 경상도 관찰사 손중돈으로부터 청렴하고 근신하여 요동되지 않아서, 모두 서리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복종한다는 평가를 받아 품계를 높여야 하였다. 그러나 현감으로서 정3품 당상에 오르는 것은 너무 지나치고, 갈릴 때를 기다려서 높여 옮기면 너무 늦으며, 백성을 잘 다스린다고 하면서 경직으로 옮기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근무 평가 뒤 도내 5품 수령의 빈자리가 있을 때를 기다려 높여 이동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동하게 된 자리가 안동판관이었다.

황사우의 일기에 등장하는 안동반자, 혹은 안동판관 박찬과 동일인이다. 1519년 3월 8일에는 예천군수를 겸하기도 하였다. 당시 경상감사의 장계와 관련한 이조의 논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관찰사 손중돈이 장계하기를,

“안동 부사 이우는 청렴하고 간결하여 사가 없으며, 창원 부사 신공제는 근면하고 근신하고 청렴하고 재능이 있으며, 현풍 현감 박찬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요동되지 않아서, 모두 서리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복종합니다.”

하였는데, 대개 전일 ‘수령 중에서 청렴하고 근신하여 봉공하는 자는 실적을 살펴서 수시로 아뢰라.’는 하유에 말미암은 것이다. 일이 이조에 내려지매, 이조가 아뢰기를,

“이우는 안동에서 명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전에 진주 목사로 있을 때에도 공적을 드러냈으며, 신공제는 매우 청렴하고 근신하며, 박찬은 효행으로 서용되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다 품계를 높여 상 주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우·신공제는 다 품계를 높여 상줄 만하다. 박찬은 계자가 통훈(정3품 통훈대부)이므로 상가하면 당상(정3품 통정대부)에 오를 터인데, 현감으로서 당상에 오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니, 갈려 돌아오거든 벼슬을 올려야 할 것이다. 다만, 갈릴 때를 기다려서 상직(상으로 관직을 높임)하는 것은 너무 늦으니, 어찌하랴?”

하매, 이조가 아뢰기를,

“포상은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상준다고 이름 붙였으면 어찌 갈릴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무릇 사람의 일이란 역시 알 수 없는 것이니, 빨리 시행해야 합니다. 다만, 이미 백성을 잘 다스린다고 이름 붙이고서 경직으로 높여 옮긴다면 역시 옳지 못합니다. 근무 평가 뒤에는 도내의 5품 수령의 빈 자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그 때를 기다려서 높여 이동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16년 6월 11일)

 

이에 대하여 사간원에서 이들 지방 수령이 공적이 있다고 하여 모두 다 승직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아뢰었다. 중종실록에는 1516년 7월 25일 이우·신공제는 수령으로 성적이 있어서 가자(품계를 높임)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9월 21일 신공제(1469∼1536)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10월 7일 활을 당길 수 없다며 사직하였다가, 1517년 2월 1일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퇴계 이황의 숙부 이우(1469∼1517)는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날 동부승지로 입직하다가 윤장·조계형과 함께 이에 가담, 협력한 공로로 정국공신이 되어 진주목사,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514년에 와서 입직승지로서 신하의 절의에 어긋나게 행동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1515년 안동부사가 되었다. 이우는 1517년 11월 8일 사망하였다. 중종실록 1517년 12월 17일에는 충주 목사 이현보의 부모가 예안현에 있다 하여 지금 바뀌어 안동 부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우의 후임으로 이현보가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사우는 1519년 1월 8일∼9일 안동에서 이현보와 박찬을 만났는데, 안동부사 이현보와는 동향이며, 반자(판관) 박찬은 이때 천거를 받은 사람이라 기록하였다.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안동에 있을 때도 이 둘을 만났다.

1519년 7월 7일 황사우는 언양현감 민세정을 만나는데 그는 1511년 박찬과 함께 효행으로 천거되었고, 이 무렵 현량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 박찬은 어떻게 정3품 통훈대부로서 종6품직인 현풍현감으로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황사우의 일기에는 1519년 6월 22일 함양군수 김사원이 통정대부라는 기록과 1520년 당상이라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군수는 종4품 조산대부나 조봉대부인데, 정3품 당상관으로서 지방 군수에 임명된 것이다. 또한 이우도 종2품직인 강원 감사까지 한 인물이지만 정3품직인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이무렵 지방관 중에는 품계가 원래 정해진 경우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조선 시대는 관직에 일정한 품계를 고정시키고 그 품계에 맞는 관원이 거쳐 가도록 하였다.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은 정치나 인사를, 종6품부터 정3품 통훈대부까지의 참상관은 행정 실무와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의 기능을, 정7품 이하 참하관은 그 보조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관직과 품계가 맞지 않는 경우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제도가 행수법이다. 즉, 품계가 높고 직임이 낮으면 행,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직임이 높으면 수라 하였다. 품계를 높이는 가자를 많이 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지배층의 자기 보전 욕구의 결과였다.

지방 수령은 해당 도의 관찰사(감사)에 의하여 출척(내쫓거나 올려 씀.)되고, 중앙의 대간으로부터 감찰과 탄핵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한 고을의 주인으로 지방 군현 통치를 총괄하였다. 수령의 임기는 5년간(뒤에는 3년간)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임기 중 교체되거나 파면ㆍ사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풍현감은 종6품으로 문과 급제자나 문음으로 천거 받은 인물 중에서 선임되었으나, 대체로 문음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군현의 행정실무를 세습하며 담당한 계층은 향리와 관노비였다.

 

“달성군지”(1992)에 보면 “현풍현 읍지”(1895)의 환적에 나오는 역대 현풍현감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단은 1593년(선조 21)부터는 부임한 순서대로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인물로는 1390년(공양왕 3) 감무로 임명된 전평원(1390∼?), 유덕수(?), 오상문(세종 때), 채석견(세조 때), 성희문(?∼1529), 이유인(1571∼1572) 등 6명에 불과하다. 한편, 1786년 제작된 “현풍현읍지(玄風縣邑誌)”와 1899년의 “현풍군읍지” ‘환적’에는 전평원, 유덕수, 채석견, 3명만 나온다. 채석견은 ‘자손인거본현’, ‘자손인거’이라 하여 현풍현감을 한 인연으로 그 자손이 현풍현에 거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유덕수의 경우 거사비(송덕비)가 있다 하였다. 결국 현풍현 읍지를 작성할 당시 1593년 부임한 신초 이전의 “읍선생안”은 없었거나 잃어버린 결과로 두 인물의 선후를 가리지 못한 듯하다.

 

유덕수(柳德粹, ?∼1591)는 재임 연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같은 이름을 1560년(명종 15년) 별시 문과에서 찾을 수 있다. 1575년(선조 8) 예천군수로 부임하기 전 어느 시기에 현풍현감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83년(선조 16) 구미시에 있는 길재를 추모하는 사당인 야은사를 중수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과 내통한 혐의로 선홍복이 형벌을 받다 죽었다. 이 공초를 담당하던 검열 이진길이 선산부사였던 유덕수의 집에서 참서를 발견하였다며 국문하였는데, 국문 중에 사망하였다.

 

오상문은 1451년(문종 1년) 증광시 정과 5위로 문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세조실록 1459년(세조 5) 8월 26일 의금부에 의해 고발되어 국문을 받았다. 그 죄는 충주 판관이었을 때 달천교의 목재를 팔았던 일, 의창의 곡식 130석을 빌려준 일, 관청이 배로 개인의 곡식을 운반해 주고 대가를 받은 일, 오룡을 죽게 한 후에 품관 등이 이웃 사람인 마노를 압슬(죄인을 심문할 때 무릎을 무거운 물건으로 짓눌러 고통을 주던 고문)한 일들이다. 충주 판관이 되기 전에 현풍 현감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채석견(蔡碩堅)은 중종실록 1507(중종 2) 5월 22일에 발견된다. 그런데 채석견(蔡石堅)이란 인물은 “한국지명총람”과 “경북마을지”에는 세종, “현풍현 읍지”(1895)를 도표화한 “달성군지”에는 세조조로 기록하였다.

성희문은 실록에 1520(중종 15) 4월 26일 영산 현감, 1523년(중종 18) 5월 20일 단성 현감으로 나온다. 1519년 7월 8일 황사우는 영산현감 이인수를 만났다. 1520년 1월 16일에서는 ‘영산에 도착하니, 현감 이인수는 하등으로 평가되어 떠났고, 창녕현감 변성이 겸임관으로 왔다.’한 것으로 보아, 성희문은 이인수의 뒤를 이어 영산현감이 된 인물이다. ?현풍현 읍지?(1895)를 참고하면 1529년 8월 22일까지 현풍현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519년 7월 13일, 1520년 1월 19일 일기에 등장하는 현풍현감 박귀령(박구령)은 실록에서 발견할 수 없다.

김숙자의 실기인 ?이존록?에 대한 황재문의 해제를 보면, 1497년(연산군 3)에 처음 간행한 것을 현풍의 목민관을 지낸 박승임이 현풍에서 구한 책을 1558년(명종 13) 무렵 저본으로 하여 중간하였다고 발문에 있다고 하였다. 박승임(1517∼1586)은 영주 출신으로 이황에게 배웠고,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물러나 있다가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대사헌 안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실록을 쓴 사관은 권벌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고 적고 있다. 1551년 6월 2일 실록에는 전교하기를 “전 정랑 박승임, 전 수찬 유경심, 전 검열 정척을 전조로 하여금 서용하게 하되, 박승임과 유경심은 외임(지방 수령)에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때 현풍현감이 된 듯하다. 그는 그 뒤 여러 지방의 수령과 황해도관찰사 및 도승지ㆍ대사간 등을 거쳤으며,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도 1551년 10월 30일 아침 현풍 현감 박승임씨가 찾아온 기사가 나온다. 이문건은 1556년 2月 29일 저녁 권우로부터 박승임이 어사 최우의 행적을 문제 삼다가 파직되어 근래 영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權祐來見, 與之着碁, 餉夕飯, 因聞玄風倅 朴承任犯御史 崔堣之行見罷, 近還榮川云云.)

실록에는 1556년(명종 11) 3월 5일 간원이 아뢰기를, “현풍 현감 신원은 교하 현감으로 있을 적에 백성들을 걸태질하고 나라의 재물을 축내어 자기의 욕심만 채웠으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온 고을이 울부짖었습니다. 그를 파직시켜 탐오한 폐습을 징계하소서.”하였다. 이에 명종은 “신원을 일시적인 과오 때문에 일생 동안 영원히 폐기시킨다면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게 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아마 신원은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러나게 된 듯하다. 신원이 묵재일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의 교류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1557년 7월 13일 현풍현감 김한례가 생선 2미를 보내 온 것을 적고 있다. 이후 김예지, 김경이 등이 나오는데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1565년 5월 1일에는 현풍현감 김이가 쌀 20말과 가죽신 하나를 보내왔다.(玄風倅 金洢送米廾斗·蹄屐齒一事等) 이 무렵 현풍현감으로는 박승임, 신원, 김한례, 신윤, 김이 등이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실록을 통해 玄風縣監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1390) 전평원

세종 9년(1427) 7월 18일 채윤(蔡倫)

세종 15년(1433) 12월 11일 권구경(權九經)

세종 21년(1439) 7월 22일 공종주(孔宗周)

세종 21년(1439) 12월 18일 김준례(金遵禮)

세종 때 오상문

세조 4년(1458) 4월 18일 최림(崔霖, 전 현풍 현감)

세조 12년(1466) 11월 2일 손윤생(孫閏生, 전 현풍 현감)

성종 4년(1473) 7월 1일 최수지(崔水智)

중종 2년(1507) 5월 22일 채석견(蔡碩堅)

중종 11년(1516) 6월 11일 박찬(朴璨)

중종 14년(1519) 7월 13일 박귀령(朴龜齡,박구령)(재영남일기)

중종 24년(1529) 성희문(?∼1529)

중종 27년(1532) 6월 9일 송희규(宋希奎)

중종 30년(1535) 1월 6일 이수진(李守震)

명종 3년(1548) 8월 20일 신난무(愼蘭茂)

명종 6년(1551) 10월 30일 박승임(묵재일기)

명종 11년(1556) 3월 5일 신원(申遠)

명종 12년(1557) 7월 13일 김한례(묵재일기)

명종 16년(1561) 7월 15일 신윤(申潤)

명종 20년(1565) 5월 1일 김이(묵재일기)

선조 20년(1587) 4월 2일 김충간(金忠幹)

선조 24년(1591) 유덕수(柳德粹, ?∼1591)

 

황사우 원저, 황위주 탈초 역주, 2006, ?탈초 역주 재영남일기?, 경상북도ㆍ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 학민문화사.

이수건 외, 1992, 「군현행정체계와 유향소」, ?달성군지?, 달성군. 279쪽, 287쪽.

이수건, 1989,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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