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달성군청 청사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 성주목 노장곡면 지역이었다.

시골(是滑) 2014. 9. 15. 20:38

 

 

 

 

올해는 달성군이 개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홍보하는 홍보물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며칠 전 지하철 동대구역에 내리니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의 달성군은 통일신라 시대 옛 위화군(수성군)의 일부인 가창면, 다사지현(하빈현)이었던 다사읍과 하빈면, 설화현(화원현) 지역은 달서구 월배 지역과 화원읍과 옥포면에 해당하며, 추량화현(삼량화현, 현효현, 현풍현)은 현풍면ㆍ유가면ㆍ 구지면ㆍ논공면 일부 지역이다.

 

 

 

조선 후기 수성현과 하빈현, 화원현 지역은 대구도호부에 속해 있었으며, 현풍현은 대구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군현이었다.

 

그럼 군청이 위치한 지역은 어디에 속했을까? 지금 달성군청 청사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 성주목 노장곡면 지역이었다. 1906년 현풍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부터 대구 중심 지역을 제외한 대구군과 현풍군 전체가 합쳐진 달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논공읍 금포(金圃)·노이(蘆耳)·삼리(三狸)·위천(渭川)가 옛 노장곡면 지역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 실록 22년(1798) 11월 4일 기사에는 현풍 현감 장석윤의 상소가 나온다.

현풍 현감(玄風縣監) 장석윤(張錫胤)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앞 부분 줄임) 현풍(玄風)의 지형은 남북이 35리이고 동서가 20리로 아주 작은 고을이라 할 만한데, 성주(星州)의 무계(茂溪)와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계에 소속된 면인 노장곡(蘆長谷)은 강을 건너와서 현풍 땅을 10여 리나 침범해 있습니다. 성주 고을은 넓이가 매우 넓어 세 면(面)의 크기가 거의 작은 고을만하며, 또 노장곡의 주민들은 50리나 떨어진 성주로 가려하지 않고 지척의 거리에 있는 현풍으로 와서 물건을 사고 팔고 송사(訟事)를 판결받고자 합니다. 먼 곳을 버려두고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니 성주의 노장곡 10리 땅을 현풍에다 떼어다 붙이는 것이 아마도 다스리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통영(統營)의 곡식 문제와 양곡을 왜관에 납부하는 문제 및 노장곡을 떼어다 붙이는 문제는 감사로 하여금 조처할 수 있는 것은 조처하고 혼자서 처리하기 곤란한 것은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현풍현 또한 강 건너에 진촌면, 답곡면, 왕지면이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의 부리·성리·옥산리·인안리, 우곡면의 객기리·답곡리·봉산리·예곡리·포리에 해당한다.

노장곡이나, 진촌 같은 곳을 월경지라고 하는데, 개간지에 대한 소유권의 인정과 개간지에 대한 소속관의 천방 사업 등에 우선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선희[이선희, <조선후기 성주 소속 노장곡에 대한 일연구>, <<중앙사론>> 18, 중앙사학회, 2003]는 월경지의 존속원인을 살폈는데, 조선전기 <성주목 팔거현 노곡(현재 칠곡군 왜관읍)>을 <가리현 노장곡>으로 오해하여 . 이재두, 20210331, 「지리지를 통해 본 대구지역의 행정구역 변천」, 『영남학』 76, 357쪽 주13).

이선희는 16세기 이문건이 팔거현 노곡부곡에 둔전을 경영한 사실을 바탕으로 노장곡과 같은 월경지가 나타나게 배경을 개간지에 대한 소유권의 인정과 개간지에 대한 소속관의 천방 사업 등에 우선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팔거현 노곡은 조선후기 칠곡도호부 노곡방(蘆谷坊)으로 관아에서 70리 떨어진 현재 칠곡군 왜관읍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가리현의 노장곡과는 다른 지역이다. 여지도서42, 칠곡도호부; 한편, 1677년에 편찬한 경산지(京山志)에서는 노곡이 성주와 32리에 있고, 가산성과 50리 거리에 있으며, 옛날에 위곡부곡(葦谷部曲)이었으며, 단천군수 이안(李晏)과 한강 정구(寒岡鄭逑)가 살던 곳으로 왜관(倭館) 터가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경산지각방 칠곡 노곡. 이재두, 위의 논문, 379쪽 주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