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원호루와 군수 홍필주

시골(是滑) 2014. 9. 19. 23:18

원호루(遠湖樓)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1길 28(상리 634)

 

시대 : 조선 고종 34년(1897년)/1996년 복원

 

 

 

 

 

1897년(고종 34년) 현풍 현령 홍필주가 인근 현령들과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현풍면 상리 현재의 면사무소 자리에 옛 건축양식으로 상층부분만 개조하여 남아 관리해 오던 중 면사무소 증축으로 해체되었다가 1996년 현풍면 상리동산에 복원하였다.

 

옛 현풍 현령 집정시 남아있는 원호루, 현풍향교, 석빙고, 현감공덕비는 지역에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향토사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군청홈페이지]

 

 

 

이 누각은 구한말 1897년 현풍현령 홍필주가 집정하고 있을 당시, 인근 현령 및 향유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풍류와 여흥을 즐기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원래 지금의 현풍면사무소(현풍면 부리 352) 후원에 있었으나 1989년 면사무소 증축으로 해체되었다가 초대 민선 달성군수 양시영에 의해서 현 위치에 이축 복원되었다. 처음에는 2층의 아담한 누각이었으나 1957년 중건하면서 높은 댓돌 위에 단층으로 바뀌었고 복원된 현 누각은 자연산 주초석을 자재로 하여 기둥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를 설치하고 그 위의 둥근 기둥에 굴도리를 들린 다락집 형태의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원호루 앞 안내문]

 

 

나는 빗돌에 새겨진 원호루 앞 안내문을 읽으면서 두 부분이 거슬렸다.

 

첫째는 1989년 면사무소 증축으로 해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6년에 다시 세운 문제이다. 80년대 말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던 무렵이고 1990년대가 되면 마이 카 붐과 함께 폭발하는 시기인데 그냥 부셔버린 게 못내 아쉽다. 요즘은 현풍면 청사 이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현풍현의 역사, 그 장소를 고려한다면 옮기지 말고 그 자리에 제대로 짓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둘째는 현령이라는 말이다. 현풍에는 유사 이래 현령이라는 관직자는 없었다. 감무, 현감, 군수, 그리고 면장이다. 홍필주는 ‘원호루 상량문’에 나와 있듯이 지군으로 군수였다.

 

1895년 모든 군현은 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8도(道) 체제가 폐지되고 전국을 23부(府)로 나누었다가 1896년에는 경상남북도로 개편되었다. 1895년 현풍현은 현풍군이 되었다. 홍필주는 조병길, 신재억에 이어 3대 군수인 셈으로 다른 군수와 달리 1896년 8월부터 1910년 1월까지 현풍군수로 있었다. 이어 대구군수를 1년 정도 역임하고 1901년 2월 중추원 칙임의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8년에 세운 그의 송덕비 두 기가 군민 체육관 뒤에 남아 있다.

 

 

“독립신문” 1899년 09월 11일자에는 “잡보 ○ 현풍 만인산) 현풍 군슈 홍필쥬씨는 엇더케 치민을 잘 하였는지 그 군 인민이 만인산을 만드러 가지고 셔울 까지 올나 와셔 각쳐 방곡에다 세워 놋코 내인 거객의게 돌녀 보힌다더라”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高宗 32년(1895년) ‘지방의 生祠, 善政碑, 萬人傘 등 잘못된 풍속을 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http://db.history.go.kr/id/sa_001r_0020_0090_0010]

그러나 이러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생사당을 만들거나 선정비를 세우거나 만인산을 들고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며 야단법석을 떨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2등급에 해당하는 안동군수 홍필주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4등급 군인 현풍군수가 되어 3년 반을 근무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지역민들은 군수가 선정을 베푼다며 송덕비를 세우고, 서울에서 만인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1900년 2등급인 대구군의 군수를 영전하게 된다.

 

만인산이 무슨 말이지? 다음 국어사전에는 “만인산(萬人傘) : 예전에, 고을 백성들이 비단을 일산(日傘) 모양으로 만들어서 가장자리에 여러 비단 조각을 늘어뜨려 유지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만든 물건을 이르던 말. 바르고 어진 정치를 베푼 수령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그 수령에게 바친다.”로 나온다. 일본어 사전에는 “<歴史> 善政ぜんせいを施ほどこした地方官吏ちほうかんりの徳とくをたたえて地方民ちほうみんが贈おくった日傘ひがさ.”라고 나오는 걸로 보아 일본으로부터 유래한 풍속이 아닌가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3건의 예가 보인다.

 

‘자수(刺繡)’항에 “<만민송덕병>·<만인산 萬人傘>·<만인수첩 萬人携帖> 등은 지방 관장이 퇴임할 때 지방유지들이 추렴하여 기념선물용으로 제작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신영균(申永均, 1833∼1922)의 시문집인 ‘인당집(忍堂集)’ 항을 보면 진안재시득만인산송덕문(鎭安在時得萬人傘頌德文)이 나온다. ‘현찬봉(玄燦鳳, 1861∼1918)’ 항에는 “1902년 수륜원주사(水輪院主事)로 임명된 뒤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승의랑(承議郎)을 역임하였다. 용인군수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불망각(不忘閣)이 세워지고, 그의 공덕을 찬양한 「만인산송(萬人傘頌)」이 만들어졌으며, 치적을 기록한 목비(木碑)가 39곳에 세워졌다고 한다.”라 하여 대체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타난 풍습으로 여겨진다. 홍필주 또한 이 시기의 인물이고 하니 그러한 풍습의 하나이지 않은가 한다.

 

한국언론재단 고신문 검색 서비스에 ‘만인산’을 검색한 결과는 독립신문 8건, 협셩회회보 1건, 매일신문 1건, 황성신문 45건, 대한매일신보 4건, 대한매일신보_국한문판 11건이다.

 

“삼천리” 제13권 제3호(1941년 03월 01일) ‘梨花女專 나오는 꽃같은 新婦들 梨花女子專門生의 學園生活’에는 만인산과 관련된 내용이 보다 풍부하게 나온다.

‘「萬人傘」이라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이것은 자기고을(郡) 원님이 善策한다는 것이 임금님 귀에 들어가라고 해서 비단 헌겁으로 우산처럼 만들고 그 우에 원님과, 고을 사람들의 이름을 色糸로 수놓은 것인데 고을사람들은 자기 고을의 원님을 위해서 서울 와 거리거리를 노래를 부르며 이것을 쓰고 야단법석을 한다는 것이 다. 매우 좋은 일이요 아름다운 풍습이나 이것도 나종엔 惡페습이 되여 원님이 스스로 돈을 내여 백성들에게 그러하기를 식힌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setId=22270&position=0]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홍필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홍필주 :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애국계몽운동가.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에게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 이후 깊어지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8979760&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2017
발행일 : 18990911
원소장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연호 : 건양 사년
창간일 : 18960407, 건양 원년 월 칠일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원문 파일을 기증받아 이미지 파일로 변환하였음
본문정보 원문 : ○ 현풍 만인산) 현풍 군슈 홍필쥬씨 엇더케 치민을 잘 얏지 군 인민이 만인산을 드러 가지고 셔울 지 올나 와셔 각쳐 방곡에다 세워 놋코 인 거의게 돌녀 보힌다더라번역문 : ○ 현풍 만인산) 현풍 군수 홍필주씨는 어떻게 치민을 잘 하였는지 해군 인민이 만인산을 만들어 가지고 서울 까지 올라 와서 각 처 방곡에다 세워 놓고 내인 거객에게 돌려 보인다더라